[로드무비] 야스쿠니와 동학혁명
[로드무비] 야스쿠니와 동학혁명
[law de movie]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Iwo Jima), 2006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사진기자 조 로즌솔이 촬영한 이오지마의 성조기(Raising the Flag on Iwo Jima). 1945년 2월 23일 미군들이 이오지마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모습. 퓰리처상을 받았다. /Joe Rosenthal
30대 이후로 날마다 달리는데 일본 유학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기숙사를 나서 야스쿠니 신사를 지나 천황이 사는 고쿄(皇居)까지 갔다가 돌아와야 10㎞가 됐다.
아침마다 야스쿠니를 지나는 게 마뜩지 않아, 야스쿠니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쪽에는 A급 전범 도조 히데키가 묻힌 조시가야 공동묘지가 있었다. 조금 더 달리면 도조가 처형된 스가모 형무소 터도 나왔다. 내가 살던 도쿄대학 기숙사가 시내 중심에 있어서인지 어디로 달려도 비슷했다. 오사카에 살던 시절에는 접하지 못한 태평양 전쟁의 역사를 도쿄에서는 자주 만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인 배우들이 일본어로 연기한 미국 영화이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에 벌어진 이오지마 전투가 배경이다. 이오지마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1200km 떨어진 태평양 작은 섬이다. 이오지마에서 다시 남쪽으로 1200km 떨어진 사이판을 1944년 미국이 확보하면서 이곳이 요충지가 됐다. 일본으로서는 본토를 폭격하러 올라오는 미국의 B-29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미국으로서는 도쿄를 폭격하고 돌아오는 B-29 비상 활주로로 쓰기 위해 필요했다. 보도사진 '이오지마의 성조기'가 퓰리처상을 받은 이유도 전투가 치열했기 때문이다.

이오지마 전투는 1945년 2월 19일~3월 26일 벌어져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패배가 예상되던 일본군은 자살 공격을 감행해 미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전술을 썼다. 일본군 병력 2만여명 가운데 90%가 죽었다. 자살 공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며 제 몸에 수류탄을 터뜨렸다. 이 때문에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군도 7만여명 가운데 7000여명이 죽고 2만여명이 부상했다. 이렇게 미국을 괴롭혀 유리한 종전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지독한 경험은 오히려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지 않고 원자폭탄을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도쿄에서 벚꽃 개화를 확인하는 곳이 야스쿠니 신사다. 야스쿠니 벚꽃을 소재로 삼은 시가 1938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출판사 고단샤(講談社) 소녀잡지에 실렸다. "너와 나, 두 송이 사쿠라 / 뿔뿔이 흩어진다 해도 / 사쿠라 피는 도쿄 야스쿠니 신사 / 봄날 가지 끝에서 꽃으로 피어 만나자." 사이조 야소(西條八十)의 '두 송이 사쿠라(二輪の桜)'이다. 이듬해 노래로 만들어져 군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젊은이들은 목숨을 던졌다.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했다.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아이들이 부르는 '이오지마 방위의 노래'가 도쿄 대본영 무전으로 전해진다. 노래와 함께 일본 군인들을 죽음으로 뛰어들며 외친다. 천황 폐하 만세!
하지만 패전 이후에도 천황은 사라지지 않았다. 록밴드 X-재팬 리더 요시키는 1999년 아키히토 천황 즉위 10주년 국민제전에 출연했다. 봉축곡으로 피아노 협주곡 애니버서리(Anniversary)를 만들었다. 고쿄 광장에 연미복 차림 요시키가 등장하자 젊은 여성들의 탄성이 터졌다. 아키히토의 다정한 모습이 연주와 함께 TV로 전국에 전해졌다. 국민제전 전날 도쿄대 교수인 문예 비평가 고모리 요이치 등이 요시키에게 공개 질문장을 보냈다. 요시키가 주최 측의 정치적 의도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국헌법의 핵심인 상징천황제를 변질시킬 수 있다고 했다.
상징천황은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1947년 시행된 일본국헌법 제1조에 있다. 이전까지의 일본제국헌법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였다. 이 조항으로 절대권력을 확보한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을 일으켜 2000만명을 희생시켰다. 그런데도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상징천황으로 살아남았다. 새로 만들어진 일본국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가 됐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천황제도이지만 어떻게든 살려내려는 일본이 맥아더 사령부(GHQ)를 설득해 성공했다.

이와 함께 일본이 GHQ 헌법안을 결정적으로 뒤집은 부분이 '국민'이다. GHQ 초안의 주어는 영어로 피플(people), 일어로 인민(人民)이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헌법의 주어가 인민(peuple)이고, 독일 헌법은 인간(Menschen)이다. 하지만 일본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국민을 헌법의 주어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일본에 남은 조선인의 기본권을 박탈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일본국헌법 시행 전날인 1947년 5월 2일 히로히토 천황이 조선 호적자를 외국인으로 간주하는 마지막 칙령을 발표했다. 기본권 주체를 국민으로 한정한 헌법을 만들려 GHQ를 속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으로 한정한 두 번째 헌법이 이듬해 한반도에서 탄생한다. 대한민국헌법이다.
앞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의 주체는 인민이었다. 가령 제3조를 보면 '대한민국의 인민은 귀천과 부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절 평등임'이다. 하지만 윤치영을 비롯한 의원들이 반대했다. 1941년 황국신민화 운동을 전개했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이에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박사는 이렇게 아쉬워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1890년 만들어진 일본제국헌법이 1947년 일본국헌법으로 바뀌면서 처음 등장한 단어가 '개인'이다. '모든 국민은 개인으로서 존중받는다(respected as individuals)'고 제13조에서 기본권의 주체로 선언했다. 제국헌법에서 '천황의 신민'이던 이들은 맥아더가 만든 헌법에서 비로소 개인이 됐다. 이 개인이라는 단어가 일본 헌법교과서에 자주 나온다. 주권의 주체는 국민이지만, 인권의 주체는 개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헌법교과서를 읽으면서는 주목하지 못한 단어다. 그만큼 제국헌법 시절 개인의 존재가 희미했고, 그래서 지금 헌법학이 개인을 세우려 애쓰는 것이다.
대한민국헌법에서 개인이 기본권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1980년 헌법부터다. 다만 1963년 헌법부터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썼을 뿐이다. 어쩌면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제국의 집단주의와 싸우면서 우리도 그들을 닮아간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판사 출신 작가 문유석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일본의 식민지배와 맞물려 있는 우리의 근대는 집단에서 집단으로 이어진 역사다. 1909년 "한·일 양국이 합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진회 합방 성명서'를 써서 순종, 통감부, 내각에 보내고 전국에 배포한 일진회 핵심 멤버가 이용구다. 1905년에는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해 조선의 식민지화를 재촉한 것도 그다. 친일파로 불리는 이용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인물이다. 북접 계통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농민군 수천을 모아 관아를 습격했고, 남북접이 연합한 공주전투에서는 손병희의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제2대 교주 최시형이 1898년 관군에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진 당시 이용구도 고문을 받아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사형집행을 기다렸다. 이때 농민들을 위한 이용구의 헌신을 기억하는 동학교도들이 감옥을 습격해 그를 구출했다. 하지만 최시형의 죽음으로 반외세 반봉건을 내세운 동학운동은 해체되었고, 동학운동 세력 가운데 반외세파는 천도교로 반봉건파는 일진회로 갈라졌다. 반봉건파들은 낡고 부패한 조선왕조의 수탈에 다시 시달리느니, 세련된 착취일지 모르지만 일본의 근대에 기대를 걸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조선이니 일본이니 하는 것은 나중 문제였을 테다.
이렇게 해서 1910년 8월 식민지배가 시작됐지만, 조선은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니었다. 조선에는 일본헌법이 시행되지 않았다. 한일합병 직전인 1910년 6월 일본 각의는 "조선에는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통치한다"고 결정했다. 대권은 천황의 권한을 가리키지만 사실상 조선총독의 전권으로 행사됐다. 대외적으로 일본국적이던 조선인에게 실정법인 국적법을 적용하지도 않았다. 국적법을 적용하면 조선인이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조선인이 외국으로 귀화해 수사 관할을 벗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일본군 사령관 쿠리바야시 다다미치는 부하들에게 함부로 자결하지 말고 살아남아 싸우라고 명령한다. 어느 날 이렇게도 말한다. "참 이상하지.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고 다짐했건만 가족을 생각하면 다짐이 흔들리니 말이야." 하지만 최후에는 그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10년 한일합병에 성공하자 일본은 일진회를 강제 해산했다. 이용구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결핵이 도지면서 쓰려져 눕는다. 그리고는 "우리는 바보짓을 했어요. 처음부터 속았던 건 아니었을까요?"라는 말을 남기고 1912년 세상을 떠났다.
이오지마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가던 병사에게, 봉건 착취에서 벗어나겠다며 바다를 건너던 동학 전사들에게, 개인은 그리고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