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 포기 각서, 전부 무효” 국가 면죄부 깨진 44년의 반전
“권리 포기 각서, 전부 무효” 국가 면죄부 깨진 44년의 반전
"재판청구권 제한은 법률로만 가능"
시행령 근거한 포기 각서 '무효' 확인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 소멸시효 완성 주장할 수 없어"

법원은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과거 보상금을 받으며 작성한 '부제소 합의' 각서가 법적 근거 없이 기본권을 제한해 무효라고 판단, 국가가 44년 만에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18년 전 정부로부터 소정의 보상금을 받으며 작성했던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 한 장. 오랜 세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를 가로막아 온 이 '부제소 합의'가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해 무효라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국가는 "이미 합의된 사안이며 소멸시효도 지났다"며 책임을 부인했지만, 법원은 행정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시행령이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를 제한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44년 전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피해자들이 뒤늦게나마 온전한 배상을 받게 된 것이다.
광주고등법원 제2민사부(재판장 김성주)는 삼청교육대 피해자 A씨와 또 다른 피해자 故 D씨의 유족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2024나23490)에서 국가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9일 밝혔다.
영장 없는 302일의 구금, 평생 남은 상처
판결문에 따르면 원고 A씨는 1980년 8월경 경찰에 연행되어 이듬해 5월까지 약 302일간 군부대에 구금된 채 순화교육과 근로봉사를 강요받았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척추관 협착증 등 영구적인 상해를 입었다 . 故 D씨 역시 비슷한 시기 약 9개월간 구금되어 가혹행위를 당했고, 2023년 사망했다 .
A씨는 지난 2006년 '삼청교육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장애보상금과 치료비 명목으로 약 490만 원을 지급받았다. 당시 A씨는 관련 법령 시행령에 따라 "이 사건에 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다시 청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동의 및 청구서(부제소 합의)를 제출했다 .
국가 측은 재판 과정에서 이를 방어 논리로 내세웠다. 피고 대한민국은 "A씨가 2006년에 이미 부제소 합의를 했으므로 소송 자체가 부적법하다"고 맞섰다 . 또한 사건 발생일로부터 5년, 피해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주장도 펼쳤다.
법원 "법률 근거 없는 권리 포기 강요는 무효"
쟁점은 A씨가 2006년에 작성한 '권리 포기 각서'의 효력 유무였다.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A씨가 작성한 각서가 법적 효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회가 제정한 '법률'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법률유보의 원칙'이 적용됐다.
재판부는 "당시 삼청교육피해자법(모법)에는 재판청구권을 제한한다는 규정이 없었다"며 "상위 법률의 위임 없이 하위 행정입법인 시행령(대통령령)만으로 소송 제기를 금지하는 서약서를 쓰게 한 것은 무효"라고 판시했다 . 즉, 국가가 행정 편의를 위해 법적 근거 없이 피해자의 소송 권리를 박탈하려 했던 시도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소멸시효 완성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과거사정리법상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했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이러한 사건에서는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권리남용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
재판부는 "2018년 대법원이 계엄포고의 위헌성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며 피해자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 사유가 있었다고 봤다 .
과거 보상금 성격 따져 배상액 정밀 산정
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여 A씨와 故 D씨에게 각각 9,000만 원의 위자료를 산정했다. 이는 불법 구금의 기간, 가혹행위의 정도, 유사 사건 피해자들과의 형평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액수다 .
다만 2심 재판부는 A씨의 일실수입(일하지 못해 발생한 손해) 산정 과정에서 1심 판결을 일부 수정했다. A씨가 2006년에 받은 490만 원 중 '장애보상금' 항목은 성격상 일실수입 배상에 해당하므로, 이번 소송 청구 기간과 겹치는 금액(약 11만 원)은 공제해야 한다고 봤다 .
이에 따라 법원은 국가가 A씨에게 위자료와 조정된 일실수입을 합쳐 96,229,255원을 지급하고, 故 D씨의 유족들에게는 상속 지분에 따라 총 9,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최종 판결했다 .
이번 판결은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정부가 법률적 근거가 미비한 시행령을 통해 피해자들의 추가적인 권리 구제를 막으려 했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