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만기 후 보증금 미반환, '거주 중 손해배상' 가능할까
전세 만기 후 보증금 미반환, '거주 중 손해배상' 가능할까
전문가들 "집 비워야 지연이자 청구 가능… 합의서엔 '위약벌' 조항 필수"

16.7억 전세 보증금을 못 받은 세입자가 이사도 못 가고 매달 수백만 원의 이자와 관리비를 부담하게 됐다. / AI 생성 이미지
16억 보증금 묶였는데… '집 안 빼면 이자 못 줘' 날벼락 맞은 세입자
전세 만기가 됐는데 16억 7천만 원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집주인. 그런데 이사를 나가지 않으면 대출 이자나 관리비 같은 손해는 한 푼도 보상해줄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16억대 전세 만기 후 보증금을 못 받은 세입자가 이사도 못 간 채 매달 수백만 원의 손해를 떠안게 된 사연이다.
2022년 2월, A씨는 전세보증금 16억 7천만 원에 아파트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2년 뒤인 2024년, 동일한 조건으로 계약을 연장했고 계약 만기일은 2026년 2월 7일로 정해졌다. A씨는 집주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 만기 5개월 전에 '이사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전달했다.
하지만 약속된 만기일이 다가오자 집주인은 "보증금을 돌려줄 돈이 없다.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와야 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제는 새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A씨는 전세자금대출 6억 원에 대한 이자로 매달 200만 원 이상, 기본 관리비 80만 원을 포함해 월 150만 원이 넘는 생활비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보증금이 묶여 다른 집으로 이사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A씨는 "만기일 이후 발생하는 대출 이자와 기본 관리비는 집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집주인은 오히려 "대출금 6억 원만 먼저 상환해주겠다. 남은 보증금은 10월 말까지 기다려달라"며 새로운 계약서 작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집 안 빼면 지연이자 못 받나?"…동시이행의 함정
A씨가 가장 궁금해하는 지점은 '이사를 가지 않은 채 거주하면서 발생하는 손해를 집주인에게 청구할 수 있는가'이다. 변호사들은 안타깝지만 어렵다는 의견을 공통적으로 냈다.
법무법인 인화의 김명수 변호사는 "보증금에 대한 지연이자를 청구하려면 이사를 하여야 하며 이사한 다음날부터 청구가 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집에 계속 거주하는 것은 '동시이행의 항변권'이라는 법리 때문이다.
동시이행의 항변권이란 집주인의 보증금 반환 의무와 세입자의 집을 비워줄 의무가 동시에 이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세입자가 집을 비워주지 않으면 집주인 역시 보증금 반환을 지체한 데 따른 법적 책임(지연이자)을 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법률사무소 금옥의 신현돈 변호사 역시 "집을 비워주지 않은 경우라면 보증금에 대한 법정이자 청구나 전세대출이자, 관리비 등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결국 A씨가 이사를 가지 않는 한, 매달 발생하는 수백만 원의 대출 이자와 관리비는 법적으로 집주인에게 청구하기 어려운 'A씨의 손해'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집주인의 '달콤한 제안', 섣불리 받았다간 '독' 된다
궁지에 몰린 A씨에게 집주인은 일부 보증금(6억 원) 상환, 잔액(10억 7천만 원)에 대한 새 전세계약서 작성, 반환 시기 10월 말로 연기 등을 제안했다.
당장의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제안처럼 보이지만, 전문가들은 '독소 조항'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전세계약서 작성'이다. 만약 남은 보증금으로 새 계약서를 쓰면, 기존 계약에서 확보했던 세입자의 막강한 권리인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의 순위가 뒤로 밀릴 수 있다.
법적 분석에 따르면 "새로운 전세계약서를 작성하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의 취득 시점이 새로운 계약 체결일로 재설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사이 집주인이 다른 빚을 져 집에 근저당권이라도 설정되면, A씨는 보증금을 떼일 위험이 더 커진다.
또한 '반환 시기 연기'에 합의하는 순간, A씨는 해당 기간까지의 지연이자를 주장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 된다.
"합의서에 '이 조항' 없으면 무용지물"…변호사들의 공통된 조언
현실적으로 A씨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집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자신의 권리를 지킬 안전장치를 촘촘히 마련하는 것이다.
변호사들은 합의서에 '위약벌 조항'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명수 변호사는 "임대인이 합의서에 기재된 이행사항 중에서 하나라도 불이행할 경우 임차인은 즉시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위약벌로 특정 금액을 지급하기로 한다는 조항을 넣으라"고 조언했다.
위약벌은 손해배상과 별개로 약속 위반 자체에 대한 벌칙금이므로, 집주인에게 강력한 이행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합의 내용을 '공정증서'로 작성하는 것도 강력한 방법이다. 금전 지급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공증을 받으면, 향후 집주인이 약속을 어길 시 별도의 보증금 반환 소송 없이도 공정증서 자체로 바로 집주인의 재산에 강제집행(압류 등)을 할 수 있다.
결국 A씨는 집을 비워야만 온전한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지만, 보증금을 받아야만 집을 비울 수 있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감정적 대응보다 '위약벌'과 '공증'이라는 법적 안전장치를 단단히 걸어 잠근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