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줬으니 괜찮다?" 발신자제한 스토킹, 법의 심판대에 서다
"만나줬으니 괜찮다?" 발신자제한 스토킹, 법의 심판대에 서다
거부 의사 명확히 했다면, 과거의 만남은 처벌의 장애물 안돼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발신자 표시 제한' 전화로 스토킹 당했다면, 명확한 거부 의사 표현 시 범죄가 성립한다. / AI 생성 이미지
"저는 이제 발신자 표시 제한 문구가 뜨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무서울 정도예요." 헤어진 연인에게 수년간 시달린 한 여성의 절박한 호소다.
모든 연락을 차단했지만, 상대는 익명의 전화 뒤에 숨어 수십 통씩 공포의 벨을 울렸다. 지긋지긋한 괴롭힘의 이유라도 알고자 만남에 응했지만, 집착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대화에 응한 사실이 범죄를 입증하는 데 걸림돌이 될까 두려웠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단호했다. 명확한 거부 의사를 밝힌 후에도 이어진 연락은 명백한 범죄라고 했다.
"내가 연락 싫어하는 거 알면 그만해달라"…차단 벽 넘어온 공포
A씨는 몇 년 전 연인과 관계를 정리하고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그러나 평온은 잠시였다.
상대는 A씨의 연락처가 막히자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수십 통씩 전화를 걸어왔다. A씨가 전화를 받아 "왜 계속 전화를 하냐, 전화 그만해라"라고 호소해도 막무가내였다. 잠잠해지나 싶으면 몇 달 뒤 어김없이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결국 A씨는 이유라도 듣고자 만남에 응했지만, 돌아온 것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일방적인 요구였다. A씨는 마지막으로 "내가 연락하기 싫은 거 알면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그 몇 년간 너한테 시달렸으니 그만해 달라. 무섭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차단했지만, 공포의 벨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홍대범 법률사무소의 홍대범 변호사는 "스토킹처벌법상 범죄 성립 요건은 ①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② 정당한 이유 없이, ③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스토킹 행위를 하여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번의 만남이 '스토킹 면죄부'? "괴롭힘 멈추려한 고육지책"
A씨가 가장 우려한 지점은 가해자의 연락에 응하거나 만남을 가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스토킹 고소를 망설였지만, 변호사들은 '전체적인 맥락'이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법률사무소 유(唯)의 박성현 변호사는 "비록 중간에 대화를 시도하거나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피해자의 진정한 동의나 관계 회복의 의사라기보다 괴롭힘을 멈추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음을 입증한다면, 스토킹처벌법상의 '지속성'과 '반복성'을 인정받는 데 큰 무리가 없다"고 강조했다.
법무법인 명륜의 오지영 변호사 역시 "판례도 피해자가 일시적으로 응답한 사실만으로 스토킹의 성립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즉, 가해자의 집요한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응한 사실이 그 이전과 이후의 모든 스토킹 행위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발신번호 없는 전화, 어떻게 증명하나…"통신사 조회가 열쇠"
그렇다면 익명 뒤에 숨은 가해자는 어떻게 특정할 수 있을까? 변호사들은 '발신자 표시 제한' 전화 기록 자체가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홍대범 변호사는 "통신사에 '통화내역 조회'를 요청하면 상대방의 번호를 특정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전화를 받지 않더라도 벨소리가 울리게 하거나 부재중 전화 기록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스토킹 행위(정보통신망을 이용한 도달)에 해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무법인 명륜 오지영 변호사도 "통신사에 요청하면 발신자 표시 제한 전화의 발신 번호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부분도 수사 과정에서 특정이 가능하다"고 확인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보낸 거절 메시지, 불안감으로 인해 병원 진료를 받았다면, 그 기록 역시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금 전화가 온다면"…즉시 나를 지키는 법적 방패
스토킹이 현재 진행형일 때 가장 시급한 것은 추가 피해를 막는 것이다. 다수의 변호사들은 경찰 신고와 함께 즉각적인 보호 조치를 신청하라고 권고했다.
더신사 법무법인의 장휘일 변호사는 "수사기관에 잠정조치나 긴급조치를 신청함으로써 추가적인 접근을 즉시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스토킹처벌법에 명시된 피해자 보호 제도로, 법원의 결정 등을 통해 가해자가 100미터 이내로 접근하거나 전화·메시지 등으로 연락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강력한 조치다.
법무법인 공명의 김준성 변호사는 민사상 접근금지가처분에 대해 "이를 위반 시 위반 횟수당 과태료가 부과되므로 매우 실효성이 높다"며,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이런 조치가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포에 떨고 있다면, 더 이상 혼자 고민하지 말고 법의 문을 두드려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