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구체적인 손해액 증명이 없다고, 손해배상청구 기각한 것은 잘못됐다"
대법원 "구체적인 손해액 증명이 없다고, 손해배상청구 기각한 것은 잘못됐다"
"손해액 증명이 어려운 경우, 재판부가 전체 상황 종합해 손해 액수 정할 수 있어"

병원 증축을 위해 건축사에게 의뢰한 설계도가 잘못돼 손해를 본 A씨.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지만 손해액을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못했다고 원심서 패소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결정은 달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병원을 운영 중이던 A씨는 환자들이 많아지자, 조금 더 큰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이에 서울 강남구에 4층짜리 건물을 사고, 보수하고 증축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2015년 9월 A씨는 B건축사무소에 설계비 4900만원과 계약금 2450만원을 주고 설계 및 감리계약을 진행했다.
2015년 연말쯤 지상 4층에서 5층으로 증축하는 내용의 건축 허가를 받았고, B건축사무소는 이 병원 건물의 설계를 모두 마쳤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설계 도면에서 하자가 발견된 것이다. 도면대로 건물을 지으면 새로 시행되는 소방시설법의 기준에 미달했던 것이다. 또한 건물의 면적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은 문제도 발견됐다.
이에 A씨는 2016년 1월, B사에 남은 계약금 1470만원을 지급한 뒤 계약을 해지했다. 그러면서도 기존 설계도의 하자를 수정하기 위해 소방자문비용으로 55만원을 추가 지급했다.
이와 별도로 A씨는 새로운 건축사무소에 1500만 원을 주고 설계도면을 다시 작성해 건축 변경허가를 받았다.
A씨는 B건축사무소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B사무소가 작성한 설계도면의 하자가 중대해 사실상 작성하지 않은 것과 같다"며 "B사무소에 지급한 설계대금 4900만원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A씨는 그러나 설계 하자로 인한 구체적인 손해액 주장과 증명은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2018년 11월 열린 2심 재판에서 A씨의 손해배상청구를 기각했다.
당시 재판부는 "B사무소의 손해배상책임은 인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손해액을 증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게 아닌데도 설계 하자로 인한 손해 발생액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과 증명이 없었다"며 이를 기각했다.
즉, B사무소가 설계를 잘못해 A씨가 손해를 입은 것은 맞지만 그 손해를 계산하지 못했으니, B사무소는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였다. 민사소송에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쪽에서 손해 발생 사실은 물론 구체적인 손해 액수까지 입증해야 할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이에 A씨는 이 문제를 대법원으로 가져갔다.
대법원 제3부(재판장 이동원 대법관)는 지난 3월 "피해자가 구체적인 손해액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법원이 쉽게 손해배상청구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며 서울중앙지법에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손해가 발생한 사실은 인정되나 구체적인 손해액을 증명하기 어려운 경우, 법원은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를 종합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금액을 손해배상 액수로 정할 수 있었다"며 원심판결의 판결 취지를 꼬집었다.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의 손해액 산정과 관련한 대법원 판례는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는 경우 법원은 손해액에 대한 당사자의 주장과 증명이 미흡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석명권(釋明權)을 행사하여 증명을 촉구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권으로 손해액을 심리·판단해야 한다"(1986년)고 돼 있다.
또 2004년 판례는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손해 발생 사실이 인정되나 구체적인 손해 액수를 증명하기 곤란한 경우, 법원은 손해가 발생한 경위와 손해의 성격, 손해 발생 후의 제반 정황 등을 종합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금액을 손해액으로 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결론적으로 대법원은 이 사안 손해액 산정과 관련해 "설계도면의 하자를 보수하는 비용으로 1500만원을 다른 건축사무소에 지급하고, 추가로 소방자문비용 55만원을 지급한 것을 A씨의 손해로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원심법원이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적정한 손해액을 정할 수도 있지 않았냐는 취지로 원심의 판결을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