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리는 CPR, 살인사건 판결문에 가장 많이 등장했다
사람 살리는 CPR, 살인사건 판결문에 가장 많이 등장했다

죽음의 기로에 놓인 사람을 살리는 응급처치 중 하나인 심폐소생술(CPR). 하지만, 이 CPR이 누군가의 '변명'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다. 바로 형사 판결문 속 살인사건에서였다. /셔터스톡·편집=조소혜 디자이너
사람의 심장 박동과 호흡이 멎었을 때 행하는 '심폐소생술(CPR)'. 죽음의 기로에 놓인 환자를 살릴 수 있기에 꼭 필요한 응급처치 중 하나다.
이처럼 본래 CPR은 사람을 살리는 기능을 하지만, 형사 판결문 속에선 정반대로 통했다. 형사 사건 전후로 CPR이 이뤄졌다는 건 그만큼 피해자 상태가 위중했음을 보여주는 근거였다. 이에 CPR이 언급된 판결문 속에선 피해자가 생존한 사건이 극히 드물었다.
특히 형사 판결문에 CPR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다름 아닌 '살인사건'이었다. CPR은 때로는 살인자의 변명으로 쓰였고, 또 다른 한편에서 범죄 진상을 밝히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로톡뉴스는 지난 11월을 기준으로 최근 2년간 공개된 CPR 관련 형사 판결문들을 검토했다. 각 1·2·3심별로 중복되는 사건은 1건으로 계산했다. 그 결과 판결문 총 40건을 추릴 수 있었다.
해당 판결문들은 크게 2종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CPR이 제때 이뤄졌는가"를 두고 다투는 의료분쟁이었다. 이에 전체 판결문 40건 가운데 8건(20%)이 업무상 과실치사 관련이었다. 그 외 사건들은 살인·강력 범죄와 연관이 있었다. 전체 판결문 중 31건(77.5%)으로 상당수가 여기 해당했다. 나머지 1건(2.5%)도 CPR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폭력이 이뤄졌지만, 가까스로 피해자가 목숨을 건진 경우였다.

세부적으로 보면 △고의로 사람을 살해하거나(16건, 51.6%) △폭력을 휘둘러 피해자를 사망하게 한 경우(10건, 32.3%), △교통사고를 내 사람을 죽게 만든 경우(5건, 16.1%) 순이었다.
또한, 살인·강력 범죄 피고인들은 피해자에게 행해진 CPR마저 자기 변명에 활용했다. 범죄 행위와 피해자 죽음 사이 인과관계를 부인할수록, 가해자가 지게 될 법적 책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CPR을 이용해 범죄 혐의를 부인한 경우가 전체 판결문 40건 가운데 17건에 달했다(42.5%).

이혼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30년간 함께 산 아내를 살해한 A씨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4월, A씨는 별거 중이던 아내를 찾아갔고 아파트 계단에서 밀어뜨린 뒤 끝내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이후 재판에서 A씨는 "피해자가 병원으로 옮겨져 CPR을 받을 때까진 의식이 있었다"면서 "그 자리에서 (나 때문에) 즉사한 것이 아니다"라고 책임을 미뤘다.
이에 대해 지난 4월, 항소심(2심)을 맡은 부산고법은 "피해자는 병원 후송 과정과 도착 후 지속적인 심폐소생술에도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고 A씨가 저지른 범죄 심각성을 지적했다. 또한 "병원 응급실에서 자발적 심장박동이 있었던 것은 각종 CPR 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모습으로 보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원심과 같이 A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B씨도 동일한 주장을 폈다. 지난해 1월, B씨는 한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발로 피해자 복부를 수회 걷어찼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늑골(갈비뼈)이 부러지며 장기가 손상돼 숨졌다.
이후 B씨는 1심 때까지는 "발로 배를 차다가 늑골까지 밟은 것 같다"며 범행을 시인하다, 갑자기 항소심(2심)부터 새로운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피해자에게 CPR 흔적이 있다는 부검 결과를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된 직후였다.
B씨는 "CPR을 하다가 늑골이 골절된 것"이라며 "피해자를 살리려 응급조치를 했던 만큼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광주고법은 "피고인은 원심에서 수차례에 걸쳐 의견서와 반성문 등을 제출하면서도, 자신이 피해자에 대해 CPR을 실시했다는 주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재판 과정에서 CPR 관련 정보를 접한 이후부터 '피해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며 B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보다 형량도 올라갔다. 앞서 1심에선 B씨에게 살인 대신 폭행치사 혐의만 인정돼 징역 5년에 그쳤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 판결을 뒤집고 강간살인 혐의를 적용,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앞서 살핀 사례처럼 일부 피고인들의 공분할 만한 주장이 법정에서 무조건 통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근거를 들어서라도 조금이나마 혐의를 줄이려 애쓰는 피고인 입장에선 "CPR 때문"이라는 주장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이 같은 주장이 유리한 양형 사유로 활용되거나, 아예 무죄가 선고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11월, 수원지법은 음주운전을 하다 사람을 치고 달아난 C씨에 대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해당 교통사고로 인해 피해자가 사망했음에도 그랬다. C씨가 사고 직후 현장을 달아났다가 다시금 돌아왔고, 피해자를 상대로 CPR을 했다는 점이 유리한 양형사유 중 하나로 통했다.
같은 해 12월, 대구지법에선 폭행치사 혐의를 받던 D씨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당초 검찰은 D씨가 아내인 피해자를 폭행해 뇌손상 등으로 숨지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D씨가 음주운전 혐의로 수배 중이라 제때 112 등에 신고하지 않은 점이 피해를 키운 것이라고도 했다.
반면 재판부는 "피고인이 평소 피해자를 폭행했다는 증언은 있으나, 사고 당일에도 그랬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며 "인공호흡이나 CPR 등 필요한 조치를 다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해당 판결은 지난해 9월 이어진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이 기사는 2022년 12월 2일 네이버 로톡뉴스 프리미엄에 먼저 발행된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로톡뉴스의 윤리강령에 부합하는 사실 확인을 거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