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전화번호로 사기치고 SNS 성희롱까지… 가해자는 유죄인데 왜 제가 졌나요?”
“가족 전화번호로 사기치고 SNS 성희롱까지… 가해자는 유죄인데 왜 제가 졌나요?”
법조계 “정신과 진료기록·주변인 증언으로 ‘피해 인과관계’ 입증이 관건… 형사처분은 강력한 무기”

A씨가 사기꾼을 형사고소해 유죄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패소했다. 왜 일까?/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형사유죄 받은 가해자 상대 위자료 소송, 1심 패소… 항소심 뒤집기 ‘이것’에 달렸다
“돈 빌려가 잠적한 것도 모자라, 제 가족 번호로 사기 행각까지 벌였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제 편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떼이고 가족 정보 도용 사기, SNS 성희롱까지 당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낸 500만 원의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패소해 법조계의 의문을 낳고 있다.
사건의 시작은 평범한 금전 거래였다. A씨는 피고에게 돈을 빌려줬지만, 피고는 이내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배신감에 치를 떨던 A씨에게 더 큰 충격이 찾아왔다. 한 중고거래 플랫폼 이용자로부터 “당신 가족 전화번호로 사기를 당할 뻔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피고가 A씨 가족의 전화번호를 도용해 제3자에게 사기를 치려다 미수에 그친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피고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A씨 가족을 허위로 고소했다. 경찰이 ‘혐의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하자, 피고는 SNS로 무대를 옮겨 A씨를 향한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입에 담기 힘든 성적 모욕과 명예훼손성 발언이 A씨의 일상을 무너뜨렸다.
결국 A씨는 피고를 사기죄로 형사 고소했고, 법원은 피고의 혐의를 인정해 유죄(구약식 처분)를 확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A씨는 오랜 기간 정신과 진료와 약물 치료에 의지해야 했다. 형사 재판은 이겼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형사 유죄인데 민사는 패소? 대체 왜
A씨는 형사 처벌과 별개로 자신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배상받기 위해 민사소송을 냈지만, 1심 법원은 청구를 기각했다. 가해자의 범죄 사실이 법적으로 인정됐음에도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이례적인 결과다. 법률 전문가들은 ‘인과관계 입증 부족’을 가장 유력한 패소 원인으로 꼽았다.
한장헌 윈앤파트너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형사절차에서 피고가 사기죄로 구약식 처분을 받은 사실은 불법행위가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자료”라면서도 “민사법원은 ‘사기 행위 자체가 원고의 정신적 손해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엄격하게 따지기 때문에, 1심에서는 정신적 손해 발생과 그 정도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즉, ‘피고의 불법행위(가해)’와 ‘A씨의 정신적 고통(피해)’ 사이를 연결하는 법적 고리가 1심 재판부에 충분히 제시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항소심, ‘이 증거’ 없으면 또 진다
그렇다면 항소심에서 판결을 뒤집기 위해 A씨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변호사들은 입을 모아 ‘객관적 증거’를 강조했다. 단순한 억울함 호소를 넘어, 재판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료를 내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승소 가능성을 높이려면 정신적 피해 입증 자료와 증인 진술 보강이 매우 중요하다”며 “정신과 진단서, 치료 기록, 약물 처방 내역, 진료소견서 등이 핵심 자료가 된다”고 조언했다. 감정적 호소가 아닌, 의료 기록이라는 객관적 데이터로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기윤 법률사무소의 김기윤 변호사 역시 “SNS를 통한 성적 모욕과 명예훼손 발언은 정신적 손해의 원인이 되는 또 다른 독립된 불법행위”라며 “그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물치료까지 장기간 이어졌다면 이는 위자료 산정에 있어 감정적 고통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덧붙였다.
내 고통 본 주변 사람, 법정에 세워도 될까?
A씨는 자신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 주변인의 증언이 도움이 될지도 궁금해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답했다. 객관적인 의료 기록에 더해, 주변인의 생생한 증언은 피해 상황의 신빙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남희수 더신사 법무법인 변호사는 “주변인의 증언을 보강 증거로 제출하면 정신적 손해 발생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특히 사건 전후 A씨의 심리 상태 변화, 일상생활의 어려움 등을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있다면 재판부의 판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전준휘 법률사무소 무율 변호사는 “손해배상청구가 당연히 인용되어야 하는 사안으로, 1심에서 전부 패소가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며 “상대방의 가해행위가 명백하고 구약식 처분까지 받은 사실이 있다면 항소심을 통해 충분히 1심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결국 항소심의 승패는 1심에서 부족했던 ‘인과관계’의 고리를 얼마나 단단하게 채우느냐에 달렸다. 1심 법원의 외면을 받은 A씨의 눈물이, 항소심에서는 ‘인과관계가 입증된 손해’라는 법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