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휴대폰 초기화'인데...유죄와 무죄 가른 결정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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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휴대폰 초기화'인데...유죄와 무죄 가른 결정적 이유

2025. 11. 23 12:31 작성
조연지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yj.jo@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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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인멸죄 성립과 불성립

그 운명을 가르는 '타인성' 요건의 역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형사사건에 연루된 A씨.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그는 다급히 자신의 스마트폰을 초기화했다.


범행과 관련된 문자 메시지, 사진 등 불리한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A씨의 이런 행동은 과연 처벌받을까?


"내 휴대폰 속 정보를 내가 지웠을 뿐인데"라고 항변할 수 있을까.


최근 법원은 디지털 증거 삭제 행위에 대해 사안에 따라 전혀 다른 판단을 내놓고 있어 주목된다.


어떤 경우에는 ‘증거인멸죄’라는 무거운 처벌을 내리는 반면, 어떤 경우에는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다. 단순한 데이터 삭제가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상사 지시로 파일 삭제" vs "내 혐의 감추려 초기화"… 엇갈린 법원의 판단

최근 법원의 판결은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사고 관련 보고서 파일을 PC에서 삭제한 경찰 정보관들에게 증거인멸교사죄 등을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다(2023고합74).


이들이 삭제한 파일은 다른 경찰 관계자들의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를 입증할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반면, 수원고등법원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혐의를 받던 피고인이 압수수색 전 휴대폰을 초기화한 사안에 대해 증거인멸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2022노306).


피고인이 "스포츠 토토를 한 사실이 들킬까 봐 초기화했다"고 변명한 점, 그리고 초기화 사실만으로는 범행을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여기서 핵심은 피고인이 삭제하려 한 증거가 바로 ‘자기 자신의 형사사건’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법원의 판단이 엇갈리는 이유는 우리 형법이 규정한 ‘증거인멸죄’의 성립 요건에 있다.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기준, '타인의 사건'이었나

형법 제155조 제1항은 증거인멸죄를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하는 경우에 성립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타인의’ 사건이다.


대법원은 일관되게 "피고인 자신이 형사처분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증거를 인멸했더라도, 그 행위가 동시에 다른 공범자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한 결과가 되더라도 증거인멸죄로 다스릴 수 없다"고 판시해왔다(대법원 94도2608 판결).


즉, 자신의 범죄 혐의를 감추기 위해 증거를 없애는 행위는 헌법상 보장된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의 일종으로 보아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휴대폰을 초기화하고도 무죄 판단을 받은 사례는 바로 이 법리가 적용된 결과다.


"내 사건 증거 삭제는 무죄"... 그럼 안심해도 될까?

그렇다면 자신의 범죄 증거는 마음대로 없애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오’다.


증거인멸죄라는 별도의 범죄로 처벌받지 않을 뿐, 재판 과정에서 매우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법원은 증거인멸 시도를 ‘범행 후 정황이 나쁜 점’으로 판단해 본래의 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이는 ‘양형 가중 사유’로 삼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인 범행 직후 휴대폰을 초기화하고 SNS 계정까지 비활성화한 피고인에 대해 법원은 이를 양형에 불리한 사정으로 고려했다(대전지방법원 2023고합368 판결). 범행 발각 직후 대포폰을 버린 행위 역시 "증거인멸의 정황이 발견된다"며 불리한 정상으로 참작된 사례도 있다(서울남부지방법원 2020노2259 판결).


결론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증거 삭제는 양날의 검과 같다.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한 행위는 증거인멸죄로 처벌되지는 않지만, 괘씸죄에 걸려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반면, 조직의 이익이나 타인의 범죄를 덮기 위해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중한 범죄가 되어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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