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후 결혼 약속 파기, 법적 대응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임신 후 결혼 약속 파기, 법적 대응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변호사들 "일방적 파혼은 유책행위, 위자료·양육비 청구 가능"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당신과 아이를 책임지겠다"는 달콤한 약속은 한순간에 "썼던 돈 다 돌려달라"는 비정한 통보로 바뀌었다. 항해사 A씨와 연인이 된 B씨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소개팅 앱으로 만나 짧은 시간 안에 서로의 인생 가치관이 맞는다고 확신했고, 두 사람은 미래를 그렸다. A씨가 배를 타러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B씨는 새 생명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바다 위에서 소식을 접한 A씨의 반응은 듬직했다. 그는 "당장 신혼집부터 알아보자"며 B씨를 안심시켰다. B씨가 원하는 망원동에 A씨 명의로 집까지 계약하며 두 사람의 꿈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A씨는 배 위에서 3개월간 생활비 명목으로 400만 원을 보내오며 예비 가장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 달 일찍 한국에 돌아온 A씨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잦은 다툼 끝에 그는 B씨에게 일방적으로 관계 파기를 선언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A씨는 "그동안 보낸 생활비 400만 원과 신혼집 계약금을 모두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B씨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B씨의 집에 머물다 떠나며 그녀가 사두었던 식료품과 이불, 옷가지까지 들고나가, "내 어머니가 준 반지를 돌려주기 전까진 못 준다"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뱃속의 아이와 함께 홀로 남겨진 B씨. 그녀는 이 기막힌 상황에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약속은 당신이 깼다" 위자료 청구 가능
변호사들은 A씨의 행동이 '약혼의 부당한 파기'에 해당하며, B씨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법무법인 게이트의 김범석 변호사는 "양가 인사 전이라도 신혼집 계약, 임신 등의 사정은 사실혼 관계 혹은 약혼이 성립했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된다"면서 "정당한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혼인을 파기한 경우,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임신 중 파기는 위자료 액수 산정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덧붙였다.
변호사 김수경 법률사무소의 김수경 변호사 역시 "혼인을 약속하고 집을 알아보는 행위는 약혼으로 볼 수 있으며, 일방적인 파기에 대해 위자료 청구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냈다.
생활비 400만원과 계약금, 돌려줄 의무 없다
A씨가 요구하는 400만 원과 신혼집 계약금에 대해서도 변호사들은 "반환 의무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 생활비 400만 원: 임신한 B씨에게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보낸 돈은 법적으로 '증여'에 해당한다. 법무법인 신의 박지영 변호사는 "대여금이 아닌 증여에 해당하므로 반환할 의무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 신혼집 계약금: 남자 명의로 계약했더라도, 이는 두 사람의 공동생활을 위한 지출이었다. 법무법인 대한중앙의 유지현 변호사는 "남성 본인의 판단하에 납입한 금액이므로 단순히 헤어졌다고 돌려달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A씨가 B씨의 식료품과 이불 등을 무단으로 가져간 행위는 절도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가장 중요한 '양육비'는 무조건 청구해야
두 사람의 관계가 파탄 나더라도, A씨가 져야 할 가장 무거운 책임은 바로 '아버지로서의 책임'이다.
B씨는 과거 다툼 중 "아이를 혼자 키우겠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는 법적인 양육비 청구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B씨는 A씨를 상대로 '인지 청구' 소송을 통해 법적으로 친자관계를 확립하고,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를 청구할 수 있다.
법무법인 한설의 이종윤 변호사는 "항해사라는 상대방의 직업을 고려할 때 상당한 양육비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아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경우 소송을 통해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때 '인생의 동반자'라 믿었던 남자의 배신으로 B씨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감정적인 대응보다 차분하게 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B씨 자신과 곧 태어날 아이를 지키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