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복 대신 변호인석에…판사 손자, 할아버지의 '핏줄 변론'으로 日제철 이겼다
법복 대신 변호인석에…판사 손자, 할아버지의 '핏줄 변론'으로 日제철 이겼다
법복 벗고 할아버지 변호 나선 현직 판사, 3대에 걸친 법정 투쟁서 승리
법원 '日제철 소멸시효 주장은 권리남용'

기사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참고 이미지.
법복을 입고 재판을 진행해야 할 현직 판사가 할아버지를 위해 변호인석에 섰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인 할아버지의 짓밟힌 명예를 되찾기 위해 3대에 걸친 법정 투쟁에 직접 나선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1단독 김승곤 부장판사는 고(故) A씨의 아들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1억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법복 대신 소송대리인석에…할아버지 위해 법정에 선 판사 손자
이번 재판은 A씨의 손자이자 현직 판사가 직접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해 시작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민사소송법은 단독판사가 심리하는 소송목적의 값이 1억 원 이하인 사건에 한해, 당사자의 4촌 이내 친족이 법원의 허가를 받아 소송을 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할아버지의 한을 풀겠다는 손자의 간절함이 이례적인 ‘핏줄의 변론’을 가능케 한 셈이다.
1944년 후쿠오카행 열차, 80년 만에 도착한 '정의'
A씨의 고통은 1944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2세 청년이었던 그는 일본 후쿠오카현의 일본제철 야하타 제철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해방 후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악몽 같은 기억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A씨는 끝내 일본의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채 2015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이 2019년 3월 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日제철 '시효 만료' 꼼수, 대법원 판례로 막아선 법원
법정 최대 쟁점은 소멸시효였다. 일본제철 측은 ‘불법행위를 안 날로부터 3년’이라는 민법 규정을 방패로 삼았다. 2012년 대법원이 처음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으니, 그로부터 3년이 훌쩍 지난 2019년 소송은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일본제철의 주장을 일축했다. 재판부는 소멸시효의 기산점(계산 시작 시점)을 2012년이 아닌,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배상 책임이 최종 확정된 2018년 10월 30일로 봐야 한다고 명시했다. 특히 지난해 12월 대법원이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 전까지 피해자들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일본 기업이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이라고 판시한 점을 결정적 근거로 삼았다.
결국 시간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려던 일본 기업의 시도는 법의 이름으로 제동이 걸렸다. 할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법복을 잠시 내려놓고 법정에 선 손자의 용기와 3대에 걸친 끈질긴 투쟁이 80년 만에 마침내 정의를 바로 세운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