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증거 없애는데 경찰은 '실적 마감' 분주" 12월 '수사 블랙아웃'의 불편한 진실
"범인은 증거 없애는데 경찰은 '실적 마감' 분주" 12월 '수사 블랙아웃'의 불편한 진실
성과평가 마감과 인사이동 겹친 '마의 1개월'
피해자 골든타임 위협하는 구조적 공백 분석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경찰청이 내년 10월까지 사이버성폭력 집중 단속을 예고했다. 10개월에 달하는 이례적인 장기 단속 계획을 두고 수사 현장 안팎에서는 뒷말이 무성하다. '집중' 단속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정작 연말연시에는 수사기관의 시계가 멈추는 이른바 '수사 블랙아웃'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12월 중순부터 1월 초까지, 범죄 피해자들은 수사 진행이 더뎌지는 답답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범인은 증거를 인멸하고 도주할 시간을 버는데, 경찰은 내부 실적 평가와 인사이동 준비로 인해 적극적인 수사에 나서지 못하는 구조적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법조계 전문가들의 분석을 토대로 연말연시 수사 공백의 실체와 그에 따른 위험성을 진단했다.
12월 17일이면 수사는 멈춘다? '실적 마감'의 비밀
수사 현장을 잘 아는 법률 전문가들에 따르면 경찰 수사 실무에는 보이지 않는 '마감일'이 존재한다. 공식적인 성과 평가 기준일은 12월 31일이지만, 경찰서와 지방청에서는 통계 집계와 보고를 위해 통상 12월 중순경 실적을 마감한다.
한 형사 전문 변호사는 "매년 통계를 보면 12월 17일에서 18일 정도까지 압수수색이나 소환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다가 그 이후로는 수사 활동이 뚝 끊기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해를 넘겨 1월 초가 되어서야 다시 압수수색 등이 재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주된 원인은 경찰 조직의 '성과 평가 시스템'에 있다. 12월 중순 이후에 접수되거나 처리되는 사건은 당해 연도 실적에 반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수사관 입장에서는 굳이 연말에 무리하게 강제 수사에 착수할 유인이 떨어지는 셈이다. 오히려 부족한 실적을 채우기 위해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무리하게 사건을 몰아서 처리하거나, 반대로 12월 말에는 복잡한 사건의 접수를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한다.
떠나는 자와 오는 자의 공백, 1월 인사이동의 그늘
성과 평가가 끝난 직후 찾아오는 '1월 정기 인사이동'은 수사 공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경찰 공무원의 정기 인사이동은 통상 1월 초·중순에 이루어진다. 이 시기를 앞둔 수사관들 사이에서는 복잡한 사건을 후임자에게 넘기거나, 혹은 내가 벌려놓은 일을 수습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한다.
곧 팀을 옮길 수사관이 새로운 사건, 특히 손이 많이 가는 사이버 범죄나 지능 범죄 수사에 적극적으로 착수하기란 쉽지 않다. 사건을 맡더라도 기초 조사만 하다가 인사이동 후 후임자에게 넘기게 되면, 후임자는 처음부터 다시 기록을 검토해야 하므로 수사는 필연적으로 지연될 수밖에 없다.
법조계 관계자는 "내가 수사하던 사건을 꼼꼼하게 정리해서 넘겨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실무적으로는 업무 과부하와 책임 소재 문제로 인해 인수인계 기간 동안 사건이 사실상 방치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결국 12월 중순의 실적 마감부터 1월 중순 인사이동 완료 시점까지, 약 한 달간은 수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치안 보릿고개'가 형성되는 것이다.
증거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라지는 '골든타임'
문제는 이러한 행정적 공백기가 범죄 증거 확보의 '골든타임'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성범죄나 사기 사건, 특히 디지털 증거가 핵심인 사건에서 초기 1~2주의 대응은 결정적이다.
CCTV 영상은 통상 30일, 짧게는 7일이면 자동 삭제된다. 사이버 범죄의 가해자들은 수사망이 좁혀오기 전인 범행 직후 서버 기록을 삭제하거나 계정을 탈퇴한다. 피해자가 12월 말에 고소를 진행했으나 경찰의 실적 마감 분위기와 인사이동 대기 모드에 막혀 압수수색 영장 신청이 1월 중순으로 미루어진다면, 그 사이 핵심 증거는 영구히 사라질 위험이 크다.
실제로 수사 지연으로 인해 디지털 포렌식이 불가능해지거나, 피의자가 해외로 도주해 사건이 미제 편철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는 헌법상 보장된 피해자의 '재판절차 진술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범죄 수사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가만히 있으면 묻힌다'… 피해자의 적극적 대응 필수
전문가들은 연말연시 사건에 연루된 피해자라면 수사기관의 스케줄을 마냥 기다려선 안 된다고 조언한다. 수사관의 개인적 성향이나 관행에 기대기보다, 제도적 장치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증거보전 신청'이다. 수사가 본격화되기 전이라도 CCTV나 디지털 기록 등 멸실 우려가 있는 증거에 대해서는 법원에 증거보전을 청구하거나 수사기관에 긴급 압수를 요청해야 한다. 또한 고소장 접수 시 담당 수사관 배정 여부를 즉시 확인하고, 수사가 지연될 조짐이 보이면 청문감사관실을 통해 수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거나 서면으로 수사 촉구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방어권 행사가 필요하다.
범죄는 경찰의 인사 시즌을 피해 발생하지 않는다. 실적 평가와 인사이동이라는 관료적 스케줄이 국민의 안전과 사법 정의를 지연시키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사기관 역시 연말연시 당직 체계를 강화하고, 중요 사건에 대한 인수인계 절차를 의무화하는 등 '수사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