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끝나고 일 밀렸다" 폭염경보 속 파지 더미 내몰린 노동자의 죽음
"여름휴가 끝나고 일 밀렸다" 폭염경보 속 파지 더미 내몰린 노동자의 죽음
체감 33.5도서 한 번도 못 쉬고 파지 분류
퇴근 몇 분 앞두고 쓰러진 노동자
법원 "주의의무 게을리"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체감온도 33.5도에 달하는 숨 막히는 폭염주의보 속, 한 40대 노동자는 점심 식사 이후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파지 더미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회사가 그를 쉬지 못하게 한 이유는 단 하나, "여름휴가철 이후 업무가 밀렸다"는 것이었다.
결국 더위 속에서 9시간 가까이 일하던 노동자는 퇴근을 불과 몇 분 앞두고 탈의실 앞에서 쓰러졌고,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간 이 참담한 산업재해에 대해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판사 이화송)에서 선고된 판결문을 통해 그날의 비극과 법원의 판단을 짚어봤다.
체감 33.5도 펄펄 끓는 야외… 5톤 트럭 4대 분량의 압박
비극은 2023년 8월 3일, 부산에 위치한 한 고철·파지 재활용 업체 주식회사에서 발생했다. 당시 부산은 최고 체감온도 33.5도, 최고기온 33.2도를 기록하며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상태였다.
피해자(44세)의 작업장은 그늘막 하나 변변치 않은 옥외 장소였다. 습구흑구온도지수(WBGT)가 29.4도에 달하는 후텁지근한 환경에서, 피해자는 무거운 물체를 들고 밀며 걷는 중등작업인 파지와 스티로폼 분류 작업을 해야 했다.
관련 법령상 사업주는 폭염에 노출된 장소에서 일하는 근로자에게 온열질환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 매시간 30분 휴식을 제공하고, 가장 무더운 오후 2시부터 5시 사이에는 야외 작업을 최소화하며 업무량을 조절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현장을 총괄해야 할 대표 A씨와 관리감독자 부장 B씨는 이 당연한 업무상 주의의무를 철저히 외면했다.
법원의 뼈아픈 지적 "여름휴가 후 업무 밀렸다는 이유로..."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들의 안일함과 가혹한 업무 지시를 매섭게 꾸짖었다.
> "안전·보건 조치 의무와 업무상 주의의무를 게을리한 채 여름휴가철 이후 업무가 밀렸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점심시간 이후인 13시 02분경부터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파지 분류·선별 작업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회사 측은 휴가로 밀린 물량을 쳐내기 위해 피해자와 동료 단 1명에게 5톤 트럭 4대 분량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파지 분류 작업을 지시했다. 폭염이 절정에 달한 오후 1시부터 5시 30분까지, 피해자는 쉴 틈 없이 노동을 강요받았다.
결국 피해자는 17시 50분경 퇴근을 위해 탈의실로 향하던 중 입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1시간여 만인 저녁 7시경 급성 열사병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사망이라는 중대한 결과… 그러나 '징역형의 집행유예'
검찰은 주식회사 대표 A씨와 부장 B씨를 업무상과실치사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법인인 주식회사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이들의 유죄를 모두 인정하며, 대표 A씨와 부장 B씨에게 각각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주식회사에는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했다.
사람이 사망하는 중대한 결과가 발생했음에도 실형을 면하고 집행유예가 선고된 데에는 몇 가지 양형 사유가 작용했다.
재판부는 "보건 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피해자가 사망하는 중한 결과가 발생한 점은 불리한 사정"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참작 사유를 밝혔다.
- 피고인들이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
- 피해자 유족에게 합의금 5,000만 원을 지급하고 원만히 합의한 점
- 피고인들에게 동종 범행 전력이나 벌금형을 초과하는 전과가 없는 점
5,000만 원 합의금과 집행유예로 마무리된 이 사건은, 매년 여름 반복되는 폭염 속 야외 노동자들의 위태로운 현실을 다시금 뼈아프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