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잘 서라" 협박하며 '가짜 노조' 만든 회사…법원 "위자료 배상하라"
"줄 잘 서라" 협박하며 '가짜 노조' 만든 회사…법원 "위자료 배상하라"
사측 주도로 급조된 '식물 노조'
헌법상 노동권 파괴 행위로 규정 법원 "건전한 노사 질서 무너뜨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가 직접 '대항마' 성격의 노조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심지어 임원들이 주도하여 가짜 총회 회의록을 만들고, 직원들에게 "어느 줄에 설지 잘 생각하라"며 가입을 종용했다면 이는 단순한 노무 전략을 넘어선 불법행위가 된다.
최근 법원은 회사가 주도하여 설립한 이른바 '복수 노조'가 헌법이 보장하는 근로자의 단결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하며, 이에 가담한 임직원들이 진짜 노조와 그 조합원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첩보 작전 방불케 한 '회사 우호 노조' 만들기
사건의 발단은 2020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골판지 제조업체인 T사의 청주공장 근로자들이 금속노조 산하 지회(이하 원고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회사 경영진은 비상이 걸렸다. 당시 T사의 임원 A, B, C 등은 원고 노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에 우호적인 성향의 노조를 직접 만들기로 공모했다.
이들의 계획은 치밀하고 조직적이었다. 임원들은 부하 직원들을 면담하며 "강성 노조가 생기면 회사 매출이 떨어지고 성과급도 없어진다"며 원고 노조 가입을 만류했다. 급기야 공장장은 특정 직원에게 회사 친화적인 상급 단체의 연락처를 건네주며 노조 설립을 지시했고, 단 하루 만에 졸속으로 '제1노조'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제1노조만으로는 부족했다. 원고 노조가 전 공장을 아우르는 교섭권을 요구하자, 회사는 장성공장까지 포함할 수 있는 더 큰 규모의 '제2노조' 설립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상무이사 D는 실무자들에게 "노조 설립이 급하다"며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고, 노무 담당 이사는 설립에 필요한 노하우를 제공했다.
문제는 이 '제2노조'가 실체 없는 유령 노조였다는 점이다. 설립 총회는 열리지 않았고, 회의록과 참석자 명단은 모두 허위로 작성되었다. 임직원들은 근무 시간에 회사 차량을 이용해 관공서를 오가며 설립 신고를 마쳤다. 사실상 회사가 만든 '페이퍼 컴퍼니'와 다를 바 없는 '페이퍼 노조'였다.
"잘못 선택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조직적인 가입 강요
유령 노조가 설립되자마자 회사의 압박은 노골화되었다. 관리자급 직원들은 현장 근로자들을 찾아가 "줄을 잘 서라. 한번 잘못 선택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협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제2노조 가입원서만을 내밀며 가입을 독촉했고, "최소한 파업은 막아야 한다"며 회유했다.
이러한 회사의 방해 공작은 교섭대표 노조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시기인 2020년 3월 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제2노조는 과반수 노조가 되어 교섭대표권을 획득했고, 회사는 이들과 단체협약을 체결해버렸다.
반면 원고 노조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후 관할 노동청이 제2노조의 설립 과정에 하자가 있음을 확인하고 설립 신고 수리 처분을 직권 취소했음에도, 회사는 "제2노조가 무효가 된 건 아니다"라는 핑계를 대며 원고 노조와의 교섭을 1년 가까이 거부했다.
법원 "노동 3권 본질 침해... 위자료 배상하라"
법원은 회사의 이러한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를 넘어선 불법행위로 규정했다. 재판부는 "사용자 측이 처음부터 근로자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 설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공모했다"며 "이는 노사 관계의 사회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헌법상 보장된 노동 3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특히 법원은 가짜 노조를 앞세워 진짜 노조를 무력화하려 했던 사측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근로자들이 자주적으로 노조를 설립한 것 같은 외형만 갖췄을 뿐, 실제로는 사측의 개입 하에 만들어진 노조를 통해 원고 노조의 교섭권을 박탈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법원은 불법행위를 공모한 임직원들이 공동하여 원고 노조에게 3,000만 원, 지회장 등 간부들에게는 직책에 따라 120만 원에서 6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항소심에서 인정 범위 확대... "조합비 낸 기록만 있어도 피해 인정"
주목할 만한 점은 항소심에서 피해를 인정받은 조합원의 범위가 대폭 늘어났다는 것이다. 1심에서는 노조 가입신청서의 작성 일자가 명확하지 않은 일부 조합원들에 대해 "부당노동행위 당시 조합원이었는지 불분명하다"며 배상 청구를 기각했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대전고등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가입신청서 일자가 비어있더라도, 당시 조합비(10만 원)를 입금한 내역이 명확하다면 조합원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1심에서 패소했던 평조합원 14명도 각각 60만 원의 위자료를 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재판부는 "사측의 지배 개입으로 인해 노조원들은 단결권 침해뿐만 아니라, 회사 눈치를 보며 심리적 위축을 겪는 등 무형의 손해를 입었다"며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 필요성을 분명히 했다.
이번 판결은 회사가 복수노조 제도를 악용해 '어용 노조'를 만들고 이를 통해 민주적인 노조 활동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단순히 행정적 처벌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금전 배상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