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고발장 속 살아남을 '죄명'은?⋯투표용지 대란 부른 선관위, 처벌 향한 그물은
쏟아지는 고발장 속 살아남을 '죄명'은?⋯투표용지 대란 부른 선관위, 처벌 향한 그물은
선관위 수사, '직무유기' 혐의 살아남기 힘든 까닭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며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국민의 기본권인 투표권이 '용지 부족'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가로막힌 초유의 사태, 경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법조계의 전망은 한없이 차갑다.
경찰이 오는 8일 시민단체를 상대로 고발인 조사를 시작하며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유발한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한다.
고발된 혐의는 직무유기, 직권남용, 업무상 횡령·배임 등이다. 이와 별개로 헌법재판소에는 참정권 침해를 이유로 한 헌법소원도 2건 접수됐다. 여론의 분노를 넘어 본격적인 법리 경쟁 단계로 돌입한 것이다.
직무유기 고발,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사건의 진정한 승부처는 수사기관이 어떤 죄명을 붙이느냐가 아니라, 치열한 법리 공방 속에서 어떤 법적 프레임이 끝까지 살아남느냐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사태를 둘러싼 가장 대표적인 고발 혐의인 '직무유기죄(형법 제122조)'의 생존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형법상 직무유기죄가 성립하려면 대법원 판례상 매우 엄격한 요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을 못 했거나 실수한 것으로는 부족하며, 직장의 무단이탈이나 직무의 의식적인 포기 등 국가 기능을 저해할 구체적 위험성이 있어야 한다.
대법원은 "공무원이 태만, 분망, 착각 등으로 인하여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아니한 경우나 형식적으로 또는 소홀히 직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성실한 직무수행을 못한 것에 불과한 경우에는 직무유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판시하고 있다(대법원 2001도2209 판결 등).
이번 사태의 핵심은 투표용지를 아예 준비하지 않은 '직무 포기'가 아니라, 수요 예측에 실패한 '과실(실수)'에 가깝다.
선관위 내부에 용지 부족 가능성을 뻔히 알고도 묵인하고 방치했다는 의식적 방임 정황이 명백히 입증되지 않는 한, 직무유기 프레임은 무죄 판결을 받을 확률이 높다.
선관위 고발, 생존 죄목은?
그렇다면 쏟아진 고발장과 헌법소원 중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법적 프레임은 무엇일까.
업무상 횡령·배임
재산상 이익이나 손해 발생을 요건으로 하는 범죄다. 투표용지 수요 예측 실패가 누군가의 경제적 이득이나 횡령으로 직접 연결되는 구조가 아니므로 인과관계가 성립하기 어렵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선관위가 일반적 직무권한을 불법하게 행사해 국민의 권리를 방해했다는 논리다. 하지만 투표용지 배분 자체는 정당한 직무권한이며, 특정 지역의 유권자 권리를 고의로 박탈하려 했다는 정황이 없다면 처벌이 힘들다.
헌법소원
이미 투표가 종료되어 주관적 구제 실익은 없더라도, 초유의 참정권 박탈 사태에 대한 헌법적 해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헌재의 심판 대상 자체는 될 수 있다.
다만, 헌법소원이 인용되더라도 이는 선관위 조치에 대한 위헌 확인이라는 선언적 의미에 그칠 뿐, 이미 지나간 투표권을 되살리거나 가해자를 처벌하는 직접적 수단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결국 현 단계에서 법리적으로 그나마 가장 유력하게 검토해 볼 수 있는 경로는 공직선거법 위반 프레임이다.
공직선거법(제151조 제1항)은 투표용지 작성 및 배분 의무를 선관위에 명확히 부여하고 있다. 이를 위반해 선거인의 투표권 행사를 실질적으로 방해했다는 논리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공직선거법상 처벌 조항은 주로 선거운동 위반에 집중되어 있어, 선관위 자체의 관리 부실을 직접 처벌하는 규정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경찰이 수사 초기부터 "유사 판례부터 검토 중"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이러한 법리적 한계와 공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5일 오후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며 사의를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