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달라” 비명 외면한 국회…잠든 ‘스토킹 방지법’ 19건, 비극 막을 골든타임 놓쳤다
“살려달라” 비명 외면한 국회…잠든 ‘스토킹 방지법’ 19건, 비극 막을 골든타임 놓쳤다
울산·의정부 스토킹 살인극 뒤엔 ‘계류 중인 법안’ 있었다
처벌법 17건·방지법 2건 상임위 문턱 못 넘어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울산에서 발생한 스토킹 흉기 난동 사건의 피해자는 현재 중태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집 앞을 서성거리다 경찰에 두 차례나 신고됐고 접근·연락 금지라는 잠정조치까지 내려진 상태였으나, 법의 그물망은 비극을 막지 못했다. 이틀 전 경기 의정부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세 차례의 신고와 보호조치가 무색하게 피해자는 옛 직장 동료의 흉기에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참혹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배경에는 국회의 ‘입법 방치’가 있다는 지적이 매섭다. 2024년 5월 국회 개원 이후 발의된 스토킹 관련 법안은 총 19건에 달하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은 법안은 단 한 건도 없다.
반복되는 ‘예고된 비극’…법안 19건이 담았던 해법들
현재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스토킹처벌법 개정안 17건과 스토킹방지법 개정안 2건이 각각 법제사법위원회와 여성가족위원회에 묶여 있다. 만약 이 법안들이 제때 처리되었다면 최근의 참변을 막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덕흠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스토킹 행위 범위 확대’안이다. 일본 법을 참고한 이 개정안은 현행법상 모호한 ‘서성거리는 행위’를 스토킹으로 명시했다. 울산 사건 당시 가해자가 집 앞을 서성일 때 이 법안이 시행 중이었다면 보다 강력한 선제 조치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조인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원이 잠정조치를 결정한 후 실제 이행 여부를 수시로 조사하도록 하는 내용을, 소병훈 민주당 의원은 피해자가 수사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법원에 보호명령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담은 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모든 대책은 입법 절차라는 높은 벽에 가로막혀 있다.
왜 안 움직이나? 국회 ‘위원회 중심주의’의 그림자
법조계는 이 같은 입법 지연의 원인을 구조적 문제에서 찾는다. 헌법재판소 결정(2020. 5. 27. 선고 2019헌라6)에 따르면 우리 국회는 의안 심의에 있어 '위원회 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전문적인 심사를 가능케 하지만, 반대로 특정 상임위 단계에서 법안이 멈춰버리면 본회의 상정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여기에 정치적 입법 교착 상태가 기름을 붓는다. 헌법재판소는 과거 "정당 간 입장 차이로 법안이 처리되지 못하는 입법 교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2016. 5. 26. 선고 2015헌라1). 스토킹 법안 역시 처벌 수위나 예산 배정, 수사 권한 조정 등을 둘러싼 정치적 견해 차이가 입법의 우선순위를 뒤로 밀어내고 있다는 평이다.

선진국은 이미 ‘예방’ 중심…우리 국회의 과제는
해외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국의 경우 2019년 '스토킹 방지법'을 제정해 형사 판결 전이라도 경찰이 법원에 보호명령을 신청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전 예방 조치를 극대화했다. 미국 역시 이미 1990년대에 연방 차원의 모델 법안을 마련해 각 주가 신속하게 입법에 나서도록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국회가 ‘뒷북 대응’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스토킹처벌법(2021년 시행)과 스토킹방지법(2023년 시행)은 아직 보완할 점이 많은 신생 법률이다. 국회법 제85조의2에 명시된 ‘신속처리대상안건(패스트트랙)’ 지정 등을 통해서라도 시급한 민생 법안을 우선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피해자의 생명권은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잠든 법안 19건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이, 스토킹 피해자들은 오늘도 불안한 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