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 사색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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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을, 사색의 계절

2022. 09. 16 10:41 작성
정진섭 변호사의 썸네일 이미지
jsjung@souln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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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의 계절, 가을.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 있다. 해당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 없는 참고용 이미지. /셔터스톡

수확의 계절, 가을의 한복판입니다. 한가위 추석 명절의 성묫길엔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 있고, 연휴 마친 출근길의 은행나무는 벌써부터 은행열매가 수북하게 떨어집니다.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듯이, 어느덧 60대 후반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저도,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고정관념으로 인한 실수와 시행착오를 거울로 삼아, 늦게나마 자연의 순리와 같은 삶과 죽음의 여정에 대해 매일매일 통찰하며 지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합일, 사랑, 공경, 정직, 정의, 친절, 연민과 같은 인간정신의 위대한 측면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고 탐구해 나가고 싶습니다. 다만 그 외형보다는 인간정신의 원천이자 본질인 '나'에 대한 '자각'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하는 삶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 달 인생 2.5모작 이야기의 제목을 '인생의 가을, 사색의 계절'로 잡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1. 천재 한명이 세상을 바꾼다 - 아인슈타인 박사

20세기 초반 세계 최고의 천재 아인슈타인 박사는 유태계 독일인이었다.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공과대학 시절 낙제도 했고, 학업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치 압제를 피해서 스위스로 건너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특허청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기존의 과학 원리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고 통찰을 거듭했고, 수학자인 아내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가 통찰한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유명한 E=mc2 공식으로 표현되는 상대성원리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자기가 태어난 독일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해서 비로소 그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아이슈타인은 자기가 태어난 독일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해서 비로소 그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아이슈타인 동상.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미국의 자존심으로 꼽히는 세계적인 전기통신 및 기초과학기술 연구소가 있다. 그 연구소의 업적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설립된 벨(Bell) 연구소가 바로 거기다. 그런데 2005년에 한국인이 그 연구소의 소장(President)으로 취임했다. 14살 나이에 미국 이민을 가서, 벨연구소의 창설 이래 최초의 외부인이자 최연소 수장에 오른 김종훈 박사가 장본인이다.


천재 한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200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진 미합중국이 세계 패권을 잡고,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천재 과학자들의 가치를 일찍이 깨닫고, 인종이나 국적 불문하고 다양한 첨단 분야의 과학자·전문가들을 받아들여서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고, 우대하는 포용 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 초기, 김종훈 박사를 초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으로 어렵게 초빙해 왔다. 그러나 혹독한 검증 끝에 후보자 지명 17일 만에 낙마했다. 그 이유는 2중국적 문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 부족 염려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당시, 아인슈타인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범국민적 캠페인을 벌였던 이스라엘의 국민의식과 비교해 보면, 지금까지도 안타깝고, 씁쓸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없다. 아직도 암기 위주의 대학수능 시험을 매년 치르고, 머리 좋고 공부 잘하면 대개 판검사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자유와 창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말 안타까운 풍토다.


2.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 의식의 세계에는 거리 개념이 없다

얼마 전 미국 NASA에서 제임스 웹이라는 천체망원경을 새로 띄워 올렸다. 30년 전 쏘아 올린 허블망원경의 시대는 지나버렸다. 제임스 웹의 성능이 몇백 배 뛰어나고, 그 망원경이 촬영해서 보내오는 데이터는 기존의 천체 물리학이 가졌던 모든 지식을 뛰어넘고 있다. 지금까지 허블 망원경이 발견한 가장 먼 은하계는 130억 광년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이 우주에서 가장 먼 은하계라고 생각했는데, 제임스 웹이 영상을 보내기 시작하자마자 330억광년의 은하계가 발견되었고,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만에 360억광년 떨어진 은하계가 또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다. 앞으로 제임스 웹 망원경이 찍히는 대로 데이터를 보내오게 되면, 우주 천체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모든 방향을 다 찍다 보면 앞으로 1년 뒤, 2년 뒤 제임스 웹이 보내올 데이터에는 그 수치를 뛰어넘을 게 얼마나 많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기존의 우주과학자들은 우주 탄생은 138억년밖에 안 됐다고 설명해 왔는데. 앞으로 500억광년 거리의 은하계가 등장한다면, 그보다 더 멀리 1000억 광년 떨어진 은하계가 또 발견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시 빛의 속도를 잘못 측정한 것은 아닐까? 과연 우주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정말 우주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끝은 있을까? 만일 끝이 있다면 우리 인류가 과연 그것을 볼(인지할) 수나 있을까? 너무나 궁금한 것이 많고, 수많은 상상과 추측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결국 우주를 관찰하는 것도 빛이 도달했을 때 감각적으로 '본다'라는 개념으로 인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몸이 하나로서 일체이듯이, 전체우주가 하나의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주너머 저쪽에서 몇백억년 동안 빛이 달려와서 보여지는 게 아니라, 항상 동시다발적으로 볼(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손을 부딪치면서 감각을 느끼고, 음식을 먹을 때도 육신이 하나로서 일체이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것을 느낄(인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존의 천체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태초에 우주 탄생의 빅뱅이 있었고, 이후 끊임없이 팽창되고 있다고 설명해 왔는데, 앞으로 천체관측상 관찰자의 눈에 인식되기까지 빛의 이동거리나 속도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어진다면, 결국 고전적인 빅뱅이론이 크게 바뀌거나 폐기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우주이론이 나와도, 육신을 기반으로 하는 '지금의 나'라는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나'라는 관점은 지구의 관점이고, 태양계의 관점이며, 조금 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 은하계의 관점이지만, 전체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조차 우주 한구석에 위치한, 조그만 '별'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불현듯 "의식의 세계에는 거리의 개념이 없다"는 말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전체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동시다발적으로 볼(인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강기슭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지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전체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결국 우리의 의식세계는 거리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무엇이든지 볼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다', '인지한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개념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것이 '나'의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일체즉일(一切卽一)의 '자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말은 선뜻 이해가 쉽진 않지만, 허공의 관점에서 곰곰이 통찰해 보면 이해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3.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 참새와 허공의 비유

사실 모든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쌓아온 고정관념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한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사색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어도, 삶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습득한 자기 고집을 바꾸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어떤 사람은 "내가 살아보니까 삶의 의미는 이렇더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저렇더라."하고 나름대로 삶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그렇게 삶의 정의를 내리다 보면, 자기가 내린 삶의 정의에 근접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살아야 되고, 저렇게 살아야 된다."는 식으로 자꾸 연결을 시켜나간다. 그래도 자기 삶이 힘들면 "내가 사는 방법이 뭔가 틀렸나?"하면서 더 나은 길이나 방법을 찾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고, 거기서 뭐든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렇듯이 사람들은 누구나 희로애락이나 번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태어나고, 살아지고, 늙어지고, 죽어진다는 인생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이다'하는 막연한 기대와 상상의 꿈을 꾸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상상과 꿈속의 삶에는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존재의식)이 깔려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육신과 동일시하는 '지금의 나'를 자기자신으로 여기고 있으며, 모든 생각의 시발점인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을 너무나 당연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라는 의식적인 측면은, 의식의 본질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작용'에 불과하다. 차라리 '나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다'라는 비존재적 측면이 더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을 참새와 허공의 관계에 비유한다면, 마치 허공의 자유가 참새의 자유보다 더 본질적이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참새는 자기가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허공(비존재)의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참새의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듯이 '육신의 나(존재)'만을 '나'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나'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착각이다. 오히려 허공(비존재)과 참새(존재)는 일체로서 하나이며, 모든 것이 나누어질 수 없는 '나'의 의식으로 이루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를 있게 한 허공(비존재)까지 포함한 일체가 더 본질적인 '나'라는 것이다. 이 말도 선뜻 이해가 쉽진 않지만, 존재와 비존재의 가교인 '사랑'의 관점에서 통찰해 보면 이해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4. 밧줄을 뱀으로 착각한다고 해도 -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밤길을 걷다가 밧줄을 밟았는데, 그 순간 뱀인 줄 잘못 알면 당장 놀라서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놀랐을 당시에도 그 밧줄의 정체성은 변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저 착각해서 그렇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렇듯이 자기 정체성의 근본은 자기가 아무리 착각한다고 할지라도 변하는 게 아니다.


대개 사람들은 '내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첫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모르고, 육신과 동일시하는 '지금의 나'를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존재의 기원은 무엇이며,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찾고, 이 존재는 어디에서 끝날까, 어디로 갈까 하는 의문을 갖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답을 찾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답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의문의 시작점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첫 생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착각한다고 할지라도 그 근본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그 시작 자체가 오류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가지고 답을 찾고, 무언가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런 '자각'이 없다 할지라도 현상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어젯밤 그 자리에 다시 가보니 뱀이 아니라 밧줄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두려운 마음이 단지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니 우리 공부의 초점은 여태까지 육신과 동일시해온 '지금의 나'는 자기자신에 대한 오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늦게나마 자기자신의 본질을 깨우치기 위해서 마음공부도 하고, 인문학적 통찰도 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나'를 '나'라고 여겼는데, 이것이 전부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 자신의 본질은 무엇이든지 만들어낼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다. 나누어질 수 없으면서도 존재를 위해서 비존재를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바로 '나'의 본질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허용하고 포용하는 허공과 같은 '자유'이자, 존재와 비존재의 가교, 즉 '사랑'이다.


그렇다 해도 거창하게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변성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특정한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공부 목적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자기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오직 하나밖에 없다. 우리가 인문학적 통찰을 강조하면서도, 어떤 명확한 답을 찾았다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5. 마무리 - 자유와 사랑

'천우신조(天佑神助)' 글귀. /정진섭 변호사 제공

공부모임에서 나온 에피소드를 토대로 초고 작성을 마치고 몇 차례 다시 읽어보니, 쉽게 표현하려고 고친 부분이 도리어 난해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저곳 문맥을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분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어릴 적 철도공무원 아들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고, 약간 오만하고 화려했던 검찰인생 제2막을 지나서, 지금은 다시 평범한 무명 변호사로 되돌아와서 인생2.5모작 생활을 하고 있는 저는 남들처럼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거쳤고, 그럼에도 여전히 육신에 기반한 '지금의 나'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것을 허용하고 수용하는 '허공의 자유'를 조금씩 깨달아 가면서 지내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바다에서 일어나 바다로 되돌아가듯이,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은 기본적인 원소로 환원되어 우주만물에 합일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순리이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 자연의 순리 속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존재와 비존재의 가교인 '사랑'이라고 확신합니다. 순수한 사랑은 마치 있음(有)을 만들어 내는 없음(無)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기반으로 한 '지금의 나'는 '나'에 대한 그릇된 동일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보자는 의미입니다. 즉 '지금의 나'만을 '나'라고 여기는 고집과 아집을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연초에 시작한 이번 연재를 통해서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는 감히 인간본성에 대한 지성적 통찰을 인생의 3모작 과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 본성에 대한 지성적 이해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든 이에게 최종적이며 숙명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바로 자기자신을 위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육신이 사라져도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위대한 인간정신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늦게나마 제가 '자유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정신의 위대한 측면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이런 공부의 성과를 조그만 글로 써서 내놓게 된 것은 내 삶의 천행(天幸)이자 천우신조(天佑神助)와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위의 '천우신조' 족자는 올해 93세 되신 장인어른께서 몇 년 전 추석 선물로 써주신 글귀입니다).

이번 달에도 긴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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