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완석 변호사 2] 신림동 신발 가게 사장님, 공단 노동자에서 변호사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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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완석 변호사 2] 신림동 신발 가게 사장님, 공단 노동자에서 변호사가 되기까지

2026. 01. 23 09:38 작성2026. 02. 02 09: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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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son@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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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스펙 대신 치열한 삶으로 증명하다

사법시험 낙방·임대료 폭탄·육체노동

그가 다시 펜을 잡고 늦깎이 변호사가 된 이유

엘리트 코스 대신 장사꾼·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이완석 변호사.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굴곡진 인생을 통해 의뢰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로톡뉴스

“좋은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이 있죠. 저는 굴곡진 인생을 통해 의뢰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법무법인 제이케이의 이완석 변호사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만 밟은 법조인이 아니다. 사법시험 실패 후 동대문에서 신발을 팔았고, 인천 공단에서 작업복을 입고 땀 흘리며 일했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치열하게 살아본 경험. 그것이 지금 이완석 변호사가 의뢰인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우리 아들이 노동자가 됐구나"… 시련이 만들어낸 단단함


이 변호사의 2030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청춘을 바쳐 사법시험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잇따른 낙방이었다. 하지만 좌절감에 빠져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수험생활 중 가장이 된 그는 생계를 위해 동대문 시장으로 나섰다. 처음엔 브랜드 신발을 팔다 고전했지만, 싼 신발을 미끼 상품으로 파는 전략으로 장사를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치솟는 임대료 앞에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동대문에서 물건을 떼어다 밤늦게까지 장사하며 돈 버는 재미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장사가 좀 된다 싶으니 건물주가 월세를 550만 원까지 올려버리더군요. 열심히 벌어 건물주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 되어 결국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사법시험 낙방 후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던 이완석 변호사의 신발 가게.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손님들을 만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이완석 변호사가 과거 운영했던 신발 매장의 개업식(왼쪽)과 내부 모습. /이완석 변호사
사법시험 낙방 후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던 이완석 변호사의 신발 가게.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손님들을 만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이완석 변호사가 과거 운영했던 신림동 매장의 개업식(왼쪽)과 내부 모습. /이완석 변호사


이후 인천 남동공단의 냉동창고 자재 제조업체에 취업했다.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주 6일을 꼬박 일하며 손에 쥔 월급은 고작 163만 4,730원. 사무직인 줄 알았으나 "현장을 알아야 한다"며 건설 현장으로 내몰렸다. 야근이나 출장 수당도 없이 "먹물이 빠지더라"는 그의 회상처럼, 고된 육체노동의 나날이었다.


작업복을 입은 그를 보며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노동자가 됐구나"라며 씁쓸해하셨다. 그는 제조업 현장에서라도 제대로 인정받고 싶어 인하공전 항공기계과 야간대학에 입학해 주경야독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작업복을 입고 근무하던 이완석 변호사(왼쪽)와 그가 땀 흘려 일했던 건설 현장의 모습. /이완석 변호사
인천 남동공단에서 작업복을 입고 근무하던 이완석 변호사(왼쪽)와 그가 땀 흘려 일했던 건설 현장의 모습. /이완석 변호사


하지만 끝내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나 하나만 포기하면 가족이 행복해질 것'이라던 생각이 틀렸던 것이다. 자신의 꿈을 희생하고 현실과 타협했음에도 가족들에게 경제적 풍요도, 정서적 행복도 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30대 중반, 다시 펜을 잡고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의 꿈을 이뤘다.


"신발을 사러 온 손님을 대하던 자세가 지금 의뢰인을 만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급한 분,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분... 각자의 성향에 맞춰 소통하는 법을 그때 배웠죠. 세상 물정 모르고 공부만 했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담장 너머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담장 너머 수감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던 이완석 변호사. <더시사법률> 신문 '담장 너머 우체부' 코너를 통해 1년간 4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잊힌 이들의 법률 상담을 도맡았다. /'더시사법률'
담장 너머 수감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던 이완석 변호사. <더시사법률> 신문 '담장 너머 우체부' 코너를 통해 1년간 4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잊힌 이들의 법률 상담을 도맡았다. /'더시사법률'


이 변호사는 <더시사법률> 신문에 1년간 ‘담장 너머 우체부’라는 코너를 연재하며 수감자들의 법률 상담을 도맡았다. 재심, 가석방 문제부터 가족 관계까지, 400통이 넘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한 번은 27년째 복역 중인 무기수분에게서 사연이 빽빽하게 적힌 두툼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기약 없는 가석방을 기다리다 목숨을 끊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전해왔죠. 무기수에게도 최소한의 희망과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책적인 고민을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기억에 남는 사연은 또 있다. 한국말이 서툰 미국 국적의 재외동포 수감자였다. 귀화를 위해 한국어능력시험을 봐야 하는데, 감옥에서는 인터넷 접수가 불가능해 발을 동동 구르던 상황.


이 변호사는 교육부 담당자와 통화해 접수 방법을 알아내고 기출문제까지 출력해 보냈다. 비록 우편물이 반송되어 결과는 알 수 없게 됐지만, 작은 목소리도 허투루 듣지 않는 그의 진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단순히 법률 기술자가 아니다. 이미 형이 확정된 기결수들, 사회에서 잊힌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경청하며 따뜻한 법률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나쁜 짓 하면 벌 받아야죠"라고 했던 청년, 진짜 변호사가 되다


법대생 시절, 그는 "죄지은 사람은 벌 받아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되어 억울하게 누명을 쓴 한 가장의 사건을 맡으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1심에서 3년 6개월을 선고받은 성범죄 전과자 의뢰인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의심했지만, 초등학생 아들이 판사님께 '우리 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쓴 편지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이 변호사는 의뢰인을 믿고 현장을 발로 뛰어 결정적인 무죄 증거를 찾아냈다. 사건이 끝난 후, 평범한 일상을 되찾은 가족에게서 "어떤 사건이든 자신의 일처럼 최선을 다해줄 거라 믿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확신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때로는 의뢰인의 극단적인 선택 앞에서 자책하기도 하고, 2025년 새해부터 직장 동료들과 인왕산, 도봉산, 설악산 정상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는 이완석 변호사.


하지만 그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순간은 있다.


"의뢰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해 사건이 종결될 때 가장 힘듭니다. '내가 너무 확신을 주어 오히려 의뢰인이 다른 선택을 할 기회를 뺏은 건 아닐까', '어떻게 해야 더 믿음을 줄 수 있었을까' 끊임없이 자책하고 복기하게 됩니다."


그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다.

화려한 스펙보다 더 빛나는 인생의 내공을 가진 변호사. 당신의 삶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끝까지 당신의 편에 서 줄 사람을 찾는다면 이완석 변호사가 그 답이 될 것이다.


2025년 11월, 이완석 변호사에게 법률 상담을 받은 의뢰인이 직접 작성한 후기. /로톡뉴스
2025년 11월, 이완석 변호사에게 법률 상담을 받은 의뢰인이 직접 작성한 후기. /로톡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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