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30)] 그 아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정형근 교수 에세이 (30)] 그 아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2021. 03. 11 17:00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조카를 대신 키운 할머니. 그 조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대신 장례까지 치렀지만 자식처럼 길러준 할머니는 조카의 유산을 받을 수 없었다. 친모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학생 딸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폭행해 왔던 아버지가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그 딸의 엄마도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아왔는데, 어떻게 그런 사건이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구속되어 있는 그를 접견하려고 택시를 타고 구치소에 갔다. 그런데 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의 아내가 면회를 하려고 구치소에 갔다가, 우연히 내가 구치소 입구에서 택시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던 것 같다.


그녀는 내 법률사무소 직원에게 전화하여 "자가용도 없는 변변찮은 변호사냐?"고 항의했다고 하였다. 자기 남편을 어서 빨리 석방시켜주어야 하는 영향력 있는 잘나가는 변호사여야 하는데, 자기 변호사가 택시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신뢰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의뢰인이라서 변호사의 사소한 것이라도 문제 삼는 것은 이해해 주어야 했다.


보통 중한 죄를 저지른 자는 중형이 선고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중죄를 범한 피고인의 변론이 한편으로는 편한 점도 있었다. 그런데 딸을 성폭행한 그 피고인은 달랐다. 기소된 후에도 구금 생활의 어려움을 견뎌 내지를 못 해, 접견을 갈 때마다 불평과 고통을 하소연했다.


"잠자리가 편하지 않다.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내니 힘들다. 샤워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구금시설에서 한 방에 여러 명이 함께 지내다 보니, 저런 애로가 없을 리 없을 것이다. 저런 고통은 죗값을 치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는 매번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뿐만 아니라 보석을 청구하여 석방시켜 달라고 했다. 접견을 갈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정말로 구금 생활의 고통을 잘 견뎌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피고인에게 자신이 저지른 범죄사실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 등을 차분하게 설명해 주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조언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범죄를 뉘우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재판장에게 반성문을 자주 써서 제출한다고 했다.


피고인의 아내는 피해자인 딸로 하여금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글을 쓰도록 하여 나에게 가져왔다. 그분은 딸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남편의 석방만을 간절하게 기대하는 것 같았다. 딸이 작성한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하도록 가져오는 것을 보면서, 과연 친딸이 맞는지 의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구속되어 있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남편의 석방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판결 선고일이 되었다. 그날 예정된 다른 사건 판결 선고를 모두 마친 재판장은 가장 마지막으로 그 피고인을 호명했다. 재판장은 피고인에 대한 범죄사실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일이고, 희소한 사건이라고 하면서 판결을 선고하였다. 딸이 쓴 탄원서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 자료로 삼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을 징역 7년에 처한다"라고 했다. 그 후에 피고인을 다시 접견하였는데, 그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갈 길이 정말 없냐고 묻기를 반복했다.


무슨 영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러 잠자고 있던 아내와 자녀 2명을 살해한 사건을 수임하였다. 경찰이 피의자인 남편을 체포해 조사를 하고 있을 때, 그의 모친이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나는 즉시 영등포경찰서로 가서 그를 접견했다. 범행 당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던지, 그의 몸에서 휘발유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그는 범행 사실을 전부 인정하였다. 도대체 아내와 자식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수사 중에 잠깐 만난 것이라서 자세한 범행동기 등은 묻지 못하고 다음 날 다시 오겠다고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건을 의뢰한 피의자의 모친은 접견을 다녀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다그치듯 물었다. "우리 아들 언제 나옵니까? 집행유예로 나올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일단 며느리, 손주들 장례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분은 장례 문제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계속 언제 아들이 석방되느냐만 물었다. 워낙 큰 사건을 당하여 경황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사무실을 나가지 않고 계속적으로 아들의 석방을 약속하라고 다그쳤다. 아무래도 그 사건을 계속 맡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드님은 구속될 것이고, 집행유예로 빼줄 수 있다고 약속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매우 경색된 표정으로 직설적으로 말씀드렸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자 그분은 사건을 맡길 수 없다고 수임료를 반환해 달라고 했다. 아들을 빼줄 수 있다고 약속했던 변호사가 있다면서 그 변호사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분은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방화를 하여 살인한 피의자 접견하느라고 배어든 휘발유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 사건도 떠나갔다. 내가 좀 더 경험이 많았다면, 그런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고 냉정을 되찾도록 조언하였을 것이다. 시간이 가면 상황 파악도 할 수 있었을 것인데 너무 급하게 대응했다는 후회도 밀려왔다. 중한 죄에 대한 엄한 처벌이 무서워서 그럴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나의 감정적 대응으로 기억된 사건이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양천구청에서 법률상담을 하였다. 직선제로 당선된 단체장은 재임 기간 구민들을 위하여 여러 정책을 시행한다. 법률상담을 해주는 것도 그런 일환이다. 상담 시간은 1시간 정도인데, 20명도 넘은 분들을 상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봉사 차원으로 하는 무료 법률상담 사건은 대개 억울하지만 세상의 법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근심 어린 표정에 한마디로 해답을 줄 수 없는 각종 사연을 안고 있는 분들을 그 짧은 시간에 감당해야 했다. 내가 퇴근 시간 넘도록 상담을 하면 담당 공무원도 퇴근하지 못하게 되니까 최대한 서두르게 된다. 그래서 그곳에서 상담을 마칠 수 없는 사연을 지닌 분은 사무실로 오시라고 한다. 실제로 할머니 한 분을 사무실로 오시라고 하여 억울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조카가 있었다. 그의 생모는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집을 떠나버렸다. 그래서 그 조카는 할머니가 키웠다. 조카는 중학교 졸업 후 집을 떠났고, 평소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간혹 명절에만 불쑥 찾아오곤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그는 의정부에 있는 어느 셋방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도 홀로 살아왔다고 했다.


이발사로 지내오면서 술을 벗 삼아 지내왔고, 그 술이 건강을 해쳐 결국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자랄 때에도, 마지막 가는 순간에도 그는 혼자였다. 며칠 후에야 그는 이웃에게 발견되었다. 그 소식은 그를 자식처럼 길러줬던 서울에 살고 있던 칠순의 할머니에게도 전해졌다. 할머니는 망자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던 의정부경찰서로 달려갔다. 2000만 원이 넘게 입금된 통장과 도장, 3000만원 가량의 셋방 보증금 계약서가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이었다.


서울에서 의정부경찰서로 달려간 할머니는 속히 이 모든 것을 손에 넣고자 했다. 생모도 도망가고 없는 어린 그를 키웠고, 중학교까지 졸업시켰으니 어머니 노릇은 충분히 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경찰관은 선뜻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속 타는 마음과 달리 경찰관은 망인의 상속인이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 입장에선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실제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백발로 뒤덮인 망인의 생모가 나타났다.


화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한 줌의 재가 되어 흩뿌려진 후였다. 생모인 노파의 손에는 망인이 그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서류도 들려 있었다. 그 덕분에 당당하게 경찰서에서 통장과 임대차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그러자 망인을 어린 시절 길렀던 할머니는 "네년이 무슨 낯으로 나타나 남의 재산을 가로채냐?"고 흥분하면서 외쳤다. 그렇다고 한번 건네진 통장과 계약서가 되돌아올 리 없었다. 그래서 일부라도 받아낼 생각으로 타협안을 제시했다.


"당신은 그 자식을 낳았고, 나는 길렀으니 절반으로 나눕시다."


생모는 자꾸 법을 내세우면서 들은 체도 않았다. 분하고 억울한 생각에 사로잡힌 할머니는 화장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지출했던 장례비 300만원과 49재 때 사용하였다는 300만원이라도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때 노파 곁에는 재혼하여 얻게 된 여섯 아들 중 목사라는 큰아들이 있었다. 그 목사가 한마디 했다.


"49재 때 쓴 돈은 우리 기독교에서 인정할 수 없는 돈이라서 드릴 수 없고요. 장례비 300만원은 드리도록 하지요. 제 어머님은 지난 50년 동안 그 아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만 모르는 일상 법률 상식, 매일 아침 배달해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