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동안 법원의 '선처' 받아온 피고인, 이번엔 배심원들이 '엄벌'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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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동안 법원의 '선처' 받아온 피고인, 이번엔 배심원들이 '엄벌'에 처했다

2020. 06. 17 12:29 작성
최종윤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jy.choi@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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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갈등으로 사무실에 있던 임원 불질러 살해한 택시기사

혐의는 모두 인정 ⋯재판의 쟁점은 계획 범행 vs. 우발적 범행

변호인 "회사에서 괴롭힘당했다" vs. 검사 "30년간 19차례 선처받았다"

사무실에 있던 회사 임원을 향해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른 택시기사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지난 15일 열렸다. /셔터스톡⋅편집=이지현 디자이너

"징역 21년을 선고합니다."


순간 법정은 적막감에 휩싸였다. 온종일 눈물 속에 재판을 방청하던 유족도, 피고인 지인들도 모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높은 형량이었다. 본인 심문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눈을 감고 있던 이씨도 눈을 '번쩍' 떴다. 이날 선고된 '징역 21년'은 61세인 피고인의 나이를 생각하면 사실상 종신형에 가깝다.


지난 15일 서울서부지법 제303호 형사대법정에서 피고인 이씨의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혐의는 '현존건조물방화치사죄'. 이 죄는 사람이 있는 사무실 등에 불을 질러 사람이 사망했을 때 성립한다. 살인죄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규정돼있지만, 현존건조물방화치사죄의 경우 '7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 수위가 더 높다.


이씨는 범행 후 경찰에 자수했고,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이에 이날 재판은 범행 자체가 아닌 양형에 집중됐다. 즉, 이씨에게 선처를 내릴만한 참작 사유가 있느냐가 쟁점이 됐다.


이씨는 재판 내내 범행을 인정하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를 반복했고, 재판 중 방청석에 앉아있던 유족에게 '큰절'까지 하며 사과도 했다. 94세 노모 등 자신의 부양가족도 언급했다. 하지만 불을 질러 사람을 죽게 만든 이씨에 대한 배심원들의 판단은 엄격했다.


회사 임원의 몸에 화학물질 뿌리고 불 지른 택시기사

사건은 지난 3월 29일 새벽 1시 25분쯤 서울 마포구의 한 택시회사에서 벌어졌다. 이씨는 사무실에 있던 회사 임원 신씨를 향해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몸 60%에 화상을 입은 신씨는 사고 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집중치료를 받았으나, 지난 4월 패혈증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이씨의 범행 장면은 총 7대의 CC(폐쇄회로)TV에 담겨 이날 법정에서 그대로 재생됐다. 이씨가 회사 안 사무실을 살펴보고, 시너를 피해자에게 뿌리고 불을 붙이는 상황.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담겨 있었다.


지난 1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를 받는 이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이씨는 기존 살인미수로 기소됐다가 피해자가 치료 도중 사망하며 혐의가 변경됐다. /마포=최종윤 기자
지난 1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를 받는 이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이씨는 기존 살인미수로 기소됐다가 피해자가 치료 도중 사망하며 혐의가 변경됐다. /마포=최종윤 기자


재판의 쟁점⋯계획적이었느냐, 우발적이었느냐

불이 붙은 신씨의 모습이 증거로 제시될 때는 배심원의 탄식과 유족의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검사는 7개의 CCTV 영상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설명했다. 이씨의 범행이 계획적이었다는 핵심 증거로 제시했다.


만약 범행을 계획적으로 볼 수 있다면 처벌의 가중사유, 우발적이었다면 감경 사유가 될 수 있었다.


이에 이씨는 '계획된 범행'이 아니었다는 취지의 변론을 계속했다. "범행 당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고, 헛것도 보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사의 입장은 달랐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 각도가 다른 CCTV 장면을 제시했다.


몸에 불이 붙은 피해자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문은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같은 시각 다른 CCTV 화면에는 문 바깥쪽에 서 있는 이씨의 발이 보였다.


이날 공판 검사로 출석한 황성아 검사는 "우발적으로 불을 질렀다면서, 왜 밖에서 문을 막았죠?"라고 물었고, 이씨는 순간 머뭇머뭇하며 "막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기억이 안 나는 거냐"며 재차 묻는 검사의 질문에 이씨는 마지못해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다른 CCTV 장면도 수차례 재생됐지만, 이씨는 계속 "모르겠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황성아 검사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씨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피해자 신씨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황 검사는 이씨의 '자수'도 형을 감경받기 위한 전략이라고 봤다.


변호인 "회사 임원진 교체 후 괴롭힘당했다⋯범행을 저지른 계기도 한 번 살펴달라"

반면, 이씨의 변호인은 "이씨가 범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 동기 등을 살펴봐 달라"고 했다.


이씨가 조합원으로 있던 택시회사는 '국내 1호' 택시협동조합으로 지난 2015년 박계동 전 국회 사무총장에 의해 설립됐다. 택시기사가 주인인 '사납금'이 없는 착한 택시회사로 노란 '쿱(COOP)'택시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합은 설립 후 3년 만에 내홍에 휩싸인다. 박계동 전 이사장의 불투명한 조합 운영을 문제 삼아 비대위가 출범하고, 박 전 이사장은 지난 2018년 4월 해임됐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비대위의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새로운 집행부가 선임되면서 회사는 정상화됐지만, 이씨는 그러지 못했다. 새로운 집행부와 이씨가 갈등을 빚은 것이다. 변호인은 "이 갈등으로 인해 회사로부터 각종 고소·고발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이어 "징계로 월급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퇴직 의사를 밝히고 (자신을 향한) 형사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요청했다"면서 "하지만 회사는 오히려 가불금 200만원 반납해야 퇴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퇴직 처리도 거절되면서 이씨의 모든 희망이 무너졌다는 취지다.


재판을 맡은 서울서부지법 제11형사부 이대연 부장판사는 "왜 신씨(사망한 회사 임원)를 상대로 범행을 했냐"고 직접적으로 물었고, 이씨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어도 마찬가지였다"고 답했다.


"회사 측 (사람인) 누군가를 죽이고 (내가) 죽으면, 세상이 이 조합의 비리를 알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를 받는 이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린 서울서부지법의 모습. /로톡뉴스 DB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를 받는 이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린 서울서부지법의 모습. /로톡뉴스 DB


변호인 "94세 노모 부양해야" vs. 검사 "30년간 19차례 선처받았다"

이씨의 변호인은 최후변론에서 배심원들에게 이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씨의 94세 노모가 최근 식음을 전폐해 야위어 가고 있다"면서 "한순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처벌이 마땅하지만, 사정을 감안해 선처를 구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씨 가족이 한 달에 20만원 가량만을 사용해온 통장내역 등도 제시하며, 어려운 경제 사정도 강조했다.


하지만 검사의 입장은 달랐다. 황성아 검사는 "이씨는 1984년부터 (현재까지) 처벌전력이 19회에 이른다"면서 "하지만 매번 벌금형,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전했다.


황 검사는 "피고인의 어려운 경제 사정, 부양가족 등을 이유로 선처가 내려졌고, 그런 사법부를 비웃듯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황 검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배심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이날 배심원들은 이씨와 증인들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왜 택시기사를 시작했냐"부터, "조합(회사) 임금체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 피고인 이씨의 개인적 동기를 묻는 질문에서부터 사안을 이해해 보려는 질문까지 이어졌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후 9시 40분. 오전에 시작돼 약 12시간이 넘는 기나긴 재판의 결과가 나왔다.


서울서부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이대연 부장판사)는 "범행대상이 누가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서 "배심원 의견을 상당히 고려해 피고인에 대해 징역 21년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지난 30여년간 19차례에 걸쳐 법원의 '선처'를 받아온 이씨에게 배심원은 더 이상의 '선처'는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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