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에 호수가 없어서요" 아이돌 4명에게 걸려 온 전화...알고 보니 사생팬이었다
"택배에 호수가 없어서요" 아이돌 4명에게 걸려 온 전화...알고 보니 사생팬이었다
택배기사 사칭해 유명 아이돌 4명 집 주소 알아내
"목소리 듣고 싶었다" 변명

아이돌 집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택배기사를 사칭한 사생팬들이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벌금 300만 원을 확정받았다. /셔터스톡
"택배가 왔는데 호수가 안 적혀 있어서요. 고객님 댁 맞으시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택배기사의 다급한 목소리. 평범한 사람이라면 무심코 "아, OOO호예요"라고 답했을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 전화는 가짜였다. 전화를 건 사람들은 택배기사가 아닌, 인기 남성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사생팬이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사생활을 캐내기 위해 택배기사를 사칭하며 집요하게 주소를 알아내려 한 이들에게 법원이 벌금형을 확정했다.
서울동부지방법원 제1-2형사부(재판장 정현석)는 2025년 8월 28일,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B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과 같은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A씨는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아 일찌감치 벌금형이 확정됐다.
빗나간 팬심 "오빠 목소리 좀 듣고 싶어서"
사건은 2023년 4월, 서울 관악구의 한 주택에서 벌어졌다. SNS 음성 채팅 플랫폼에서 함께 방송을 진행하던 A씨와 B씨는 대담한 계획을 꾸몄다. 평소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집 주소를 알아내기로 한 것이다.
이들이 노린 타깃은 유명 아이돌 그룹 멤버 4명이었다. 수법은 치밀했다. 멤버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수한 이들은 택배기사를 가장해 전화를 걸었다.
"택배입니다. 호수가 안 적혀 있는데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마치 실제 배송할 물건이 있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이들의 범행은 생중계됐다. 방송을 통해 수많은 청취자가 이 불법적인 통화 내용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었다.
3명은 속지 않았지만, 1명은 입을 열었다
다행히 멤버 대부분은 속지 않았다. 3명은 수상한 낌새를 채고 정보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1명은 깜빡 속아 넘어갔다. 택배라는 말에 의심 없이 자신의 집 주소를 불러준 것이다. A씨와 B씨는 이렇게 수집한 주소를 방송을 통해 공유했다.
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단순히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조금 더 오래 듣고 싶어서 그랬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금전적 이득을 취한 것도 아니고, 실제 스토킹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법원 "팬심? 명백한 범죄... 피해자 이사까지 갔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냉정했다. 1심 재판부는 "정보통신망을 통해 속임수로 타인의 정보를 수집하거나 유인하는 행위는 엄연한 불법"이라며 두 사람에게 각각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B씨는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 역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들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아이돌 가수로, 이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실제 피해자 중 1명은 주거지가 노출된 불안감에 이사까지 갔다"고 지적했다.
이어 "단순히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범행 내용 자체가 주거 정보를 캐내려는 의도가 명백하다"고 꼬집었다.
피해자들은 엄벌을 탄원했다. 한 피해자는 수사 단계에서 고소를 취하하기도 했지만, 법원 조사에서는 "그때 상황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고통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법원은 B씨가 초범이고 우울증 등을 앓고 있는 점, 피해자들을 위해 공탁금을 낸 점 등을 참작하더라도 1심의 벌금형이 과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참고] 서울동부지방법원 제1-2형사부 2024노1003 판결문 (2025. 8. 28.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