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6)] 서울로 보내주십시다
[정형근 교수 에세이 (6)] 서울로 보내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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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법무부 차관실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 날은 퇴근 후에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셔터스톡
편집자 주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됐다. 만학도로 법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 해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수를 찾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됐다.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어느 날 법무부 차관실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 날은 퇴근 후에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얼마 전에 있었던 법무부 인사이동 때 부산지검 검사장이 법무부차관으로 발령 난 적이 있었다. 서류봉투를 건네주며 전달하라는 평소와 달리, 그 날은 약간 부피가 있는 박스를 차관실로 전달하라고 했다.
모든 정부 부처가 모여 있던 광화문 정부청사 법무부차관 부속실에 도착했다. 부산지검에서 차관님께 전달하려고 가져왔다면서 박스를 건넸다. 그러자 부속실 직원이 그 박스를 열었다. 하얀 골프신발이었다. 법무부 차관으로 영전한 검사장이 깜박 잊고 간 신발을 보내준 것이었다. 그 골프화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애써 공부하여 공무원이 되었는데 신발배달을 하고 있다니... 그 직원이 신발을 들고 차관실로 들어가니 환한 미소를 띤 차관이 부속실로 나왔다. 악수를 청하면서 “점심을 함께 하면 좋은데, 선약이 있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내내 기분이 무거웠다. 저런 신발은 우편으로 보내도 될 것인데, 높은 사람이라고 직접 보낸 것은 이해되면서도 기분이 나빴다. 서류를 전달하는 것이나, 신발을 배달하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자위해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족하여 머물지 말고,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해야 한다는 새로운 다짐을 부산역에 내릴 때까지 계속했다.
비상계엄 상태라 끝없는 긴장의 순간들이었다. 1980년 한 여름에 서무계장은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했다. 아마도 친척집에 있는 청년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무조건 집에 있어라!” 집 밖에 나오거나 친구들을 만나 어울려 다니지 말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다. 계엄사령부에서 불량 폭력배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폭력배를 잡아들여 순화교육을 시킨다는 계획이 하달된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후일 이는 삼청교육으로 알려졌다.

체포할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과거에 폭력 등으로 조사를 받고 이제는 멀쩡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거나, 학교를 다니고 있던 사람이 잡혀 들어왔다는 억울한 사연들이 들려왔다. /셔터스톡
모든 파출소와 경찰서별로 체포해야 할 인원이 할당되었다고 했다. 사표 수리할 인원을 미리 정해놓고 일괄적으로 사표를 받았던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일의 심각성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 체포할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과거에 폭력 등으로 조사를 받고 이제는 멀쩡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거나, 학교를 다니고 있던 사람이 잡혀 들어왔다는 억울한 사연들이 들려왔다. 삼청교육 대상자의 선별은 계엄사의 장교가 결정한다고 했다. 물론 검사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만, 형식적으로 앉아만 있다 오는 실정이라고 했다. 광주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 부산 등지로 도망해 오다 부두에서 검거되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더워지던 초여름 어느 날, 석간신문에 광주에서 일어난 엄청난 비극의 현장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보도된 신문 1면에는 총을 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런 언론이 전하는 기사로만 광주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그런 내용의 보도를 본 직원 중에는 “전라도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후 나는 검찰공무원 시험 관리 업무를 주관하도록 하는 지시를 받았다. 1980년에 시행되는 9급과 7급 검찰사무직 임용시험을 부산에서도 보기 때문에, 그 시험업무를 주관하는 담당자로 지정된 것이다. 한 달 후쯤에 있는 시험 관리를 위한 준비로 매주 일요일에도 출근을 하였다. 응시원서를 직접 접수하는 것부터 시험장소를 섭외하여 정하는 일, 시험을 감독하는 직원들을 선정하는 등에 관한 일을 혼자 처리해야 했다. 이윽고 응시원서 접수기간이 되었다.
수험생은 응시원서를 직접 검찰청에 나와서 제출해야 했다. 부산지검에서는 1층에 있는 당직실에서 수험생들에게 응시원서를 교부하고 접수도 하였다. 응시원서를 접수할 때는 '응시원서 접수부'라는 장부에 수험번호와 이름을 기재하고, 수험표에도 응시번호를 기재한 후 교부하였다. 이 모든 일을 직접 손으로 처리했다. 수험생이 갑자기 많이 몰려 검찰청 마당에까지 긴 줄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신속하게 처리한다고 서두르다가 수험번호를 중복하여 기재한 후 수험표를 건네는 실수도 하였다.
수험표에 동일한 수험번호를 적어서 준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면, 응시자에게 전화를 하여 정정한 수험번호를 알려주기도 했다. 전화를 받은 응시자는 당연히 엄청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뒤늦게라도 그런 실수를 발견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시험 장소는 브니엘 고등학교로 정했다. 시험지는 시험 하루 전날에 검찰청에 도착했다. 시험관리 메뉴얼에 따라 검찰청사 내에 있는 예비군 무기고에 시험지를 보관했다. 무기고가 가장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시험 당일은 정신없이 바빴다. 공무원 사회에서 특정업무의 담당자로 지정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체감한 하루였다. 시험감독 위원들이 가슴에 ‘감독위원’이라고 부착하는 리본을 배부하는 등으로 사소하게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한 과목씩 시험이 끝나갔다. 사고 없이 시험이 종료되었다. 시험지와 답안지를 법무부 직원에게 들려 보냄으로 시험관리 업무는 종료되었다.
그 날 저녁 시험주관 부서인 서무과 직원들끼리 회식을 하였다. 그간 수고하였다는 격려와 칭찬을 많이 들었다. 시험담당자인 공무원에게는 앞으로 법무부장관 표창이 수여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나는 장관표창을 받는 것 보다는 고시합격을 위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하숙생들과 너무 친하게 어울리면서 마시며 놀다보니, 새삼 공부한다고 관계를 끊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갈 길이 없나 늘 궁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계장은 웃으면서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셔터스톡
서울 출장은 여전히 많았다. 어떤 선배는 서무계장이 나를 출장 보내는 데 이용하려고 기록관리과에서 서무과로 인사이동 시켰다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제일 신입이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어느 날 계장은 나에게 서울 출장을 다녀오라고 하면서, 너무 자주 출장을 보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괜찮습니다. 이렇게 서울 보내다가 아예 서울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해 주십시오.”라고 대꾸를 했다. 그 순간 직원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선임 직원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계장님! 정형근이 서울로 보내주십시다.” 그러자 다른 선배들도 “그럽시다. 서울로 보내줍시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에서 지내는 것을 알고 있던 선배들이 응원해 주었다. 그러자 계장은 웃으면서 책상에 놓인 무전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대검찰청 총무과!”라고 교환원에게 말했다. 그리고 대검 총무과 직원에게 “우리 직원 중에 서울이 집이면서 하숙하고 있는 정형근이라는 젊은 친구가 있는데, 다음 번 인사 때 서울로 좀 옮겨 주세요.”라는 부탁을 하였다. 상대방도 승낙하는 거 같았다. 그 당시 나는 발령 받은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은 시보공무원 신분이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서울로 올라갈 기회가 그렇게 찾아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