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없는 나라, 성장도 없다…'주거 족쇄'가 대한민국 경제를 잠식한다
이사 없는 나라, 성장도 없다…'주거 족쇄'가 대한민국 경제를 잠식한다
51년 만의 최저 인구이동률, 법원의 '주거 안정' 판시도 현실의 벽에 막혀
월급 13년 모아도 '내 집'은 꿈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월급 2천만 원을 더 준다 해도 이사를 포기하는 나라. 더 나은 기회를 찾아 거주지를 옮기는 '성장의 사다리'가 대한민국에서 부러지고 있다. 개인의 도전을 가로막고 국가 경제의 활력마저 앗아가는 '이사 없는 나라'의 비극은 이미 현실이 됐다.
"연봉 2천 올려줄게"…계산기 두드려보고 이직 포기하는 청년들
경기도에 사는 한 직장인이 판교의 유망 기업으로부터 연봉 2천만 원 인상을 제안받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그러나 그는 고심 끝에 제안을 거절한다. 인상될 연봉 대부분이 판교의 높은 전셋값과 주거 비용으로 사라진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더 이상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더 나은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주거 문제 때문에 발이 묶이는 현실이 수많은 직장인을 덮치고 있다. 지난해 이직자 813만 명 중 무려 90% 이상이 같은 지역 내에서 직장을 옮기는 '제자리걸음'을 택했다.
더 높은 연봉과 성장 기회가 다른 지역에 있어도, 천정부지로 치솟은 주거비가 개인의 도전을 가로막는 거대한 족쇄가 된 것이다.
일자리는 서울, 잠자리는 경기도…51년 만의 '인구이동 실종'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시도 간 인구이동률은 12.0%. 이는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72년 이후 51년 만에 가장 낮은 충격적인 수치다. 3년 연속 이어진 저조한 이동률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단연 '주택 문제'(34.6%)가 꼽혔다. 직업(21.7%)이나 가족(24.7%) 문제를 압도하는 수치다.
이러한 모순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들어온 순유입 인구(4만 5710명)보다, 감당 불가능한 집값에 밀려 서울을 떠난 순유출 인구(6만 1758명)가 더 많았다.
'직장은 서울, 집은 경기'라는 공식은 수많은 직장인을 고단한 장거리 출퇴근의 굴레에 가두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역시 "비싼 주택 가격이 사람들이 더 좋은 직장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국내총생산(GDP)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법전에 잠든 '주거 안정'…법원 "부동산 안정은 경제의 전제"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가 '쾌적한 주거 생활'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한다. '국가균형발전 특별법' 역시 '전국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를 지향한다. 법원 또한 주거 안정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실제로 대구지방법원은 한 다주택자가 종합부동산세(고가의 부동산 보유자에게 부과하는 세금)가 과도하다며 낸 소송(2022구합25904)에서 중요한 판시를 남겼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종부세법의 목적이 "부동산 가격안정을 도모하여 지방재정의 균형발전과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주거 안정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 경제 선순환의 핵심 전제임을 사법부가 직접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법과 판결의 이상은 현실의 높은 주거비 장벽 앞에서 힘을 잃고 있다.
청년 세대가 임금보다 근무 환경을 중시하고 '집값은 계속 오를 것'이라는 비관적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주거 불안은 인구 이동을 더욱 얼어붙게 할 것이다. '이사 없는 나라'가 결국 '성장 없는 나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우리 사회 전체에 크게 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