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금지명령은 ‘종이 방패’일 뿐이었다…법 믿다 목숨 잃는 스토킹·가정폭력 피해자들
접근금지명령은 ‘종이 방패’일 뿐이었다…법 믿다 목숨 잃는 스토킹·가정폭력 피해자들
경찰 긴급조치 있지만 "물리적 한계 뚜렷"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법원의 접근금지명령이 끝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남편의 흉기에 아내가 목숨을 잃었다. 이미 남편이 집 앞에 찾아왔다며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비극을 막지 못했다. ‘종이 한 장’의 명령서가 가해자의 보복 범죄를 막아주지 못한 것이다.
가정폭력·스토킹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접근금지명령. 하지만 그 실효성을 두고 의문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1일 YTN 라디오 '이원화 변호사의 사건X파일'에 출연한 로엘법무법인 노범래 변호사는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져도 가해자가 처벌을 감수하고 접근한다면 물리적으로 막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 보호 위한 두 가지 ‘방패’
현행법상 피해자가 가해자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제도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신청하는 ‘민사상 접근금지가처분’이다. 범죄 성립과 무관하게 신청할 수 있지만, 가해자가 위반해도 금전 배상(간접강제)만 가능할 뿐 형사처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더 강력한 조치는 특별법에 근거한 ‘접근금지명령’이다. ‘가정폭력처벌법’과 ‘스토킹처벌법’은 피해자의 주거지나 직장 등으로부터 100미터 이내 접근을 금지하고, 전화·문자 등을 이용한 접근도 막을 수 있도록 규정한다. 이를 위반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노범래 변호사는 YTN 라디오에서 "가정폭력의 경우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보호명령을 신청할 수 있지만, 스토킹 범죄는 경찰이나 검사가 법원에 신청 또는 청구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피해 사실을 알려 요청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정까지 평균 2.5일…기다림의 공포
문제는 시간이다.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피해자에게 법원의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공포 그 자체다. 2022년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스토킹 범죄에 대한 법원의 ‘잠정조치’ 결정까지는 경찰 신청 후 평균 2.5일이 걸렸다. 6일 이상 걸린 경우도 7.7%에 달했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찰이 현장에서 즉시 내릴 수 있는 ‘긴급응급조치’가 있다. 가해자의 접근을 즉시 막는 이 조치는 최대 1개월까지 효력을 갖는다. 노 변호사는 "긴급응급조치는 피해자의 안전을 즉시 확보하고, 법원이 잠정조치 등을 준비할 시간을 버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문제다. 앞서 언급된 아내 피살 사건의 경우, 피해자는 접근금지명령이 끝나자마자 남편이 찾아왔다며 경찰에 신고하고 극심한 두려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긴급응급조치는 내려지지 않았고, 3일 뒤 참변을 당했다.
“벌금 내면 그만”…비웃음당하는 법
더 큰 문제는 법원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는 가해자들이다. 처벌을 감수하고 보복에 나서는 이들 앞에선 접근금지명령은 무용지물이다. 노 변호사는 “전 연인에게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두 달간 90여 차례 연락을 지속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다”고 전했다. 처벌은 이뤄졌지만, 피해자는 그 기간 내내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결국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보다 강력하고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 변호사는 "현재 스마트워치 지급, 순찰 강화 등의 조치가 있지만, 가해자가 작정하고 접근하면 범죄 예방은 현실적으로 불가하다"고 말했다.
노 변호사는 대안으로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을 확대하거나, 보복 범죄 가능성을 구속 사유로 추가하는 방안 등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실제로 2024년부터 시행된 개정 스토킹처벌법은 유죄 판결 전이라도 가해자에게 전자발찌를 부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