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 사법 도시, 독일 카를스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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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사법 도시, 독일 카를스루에

2023. 02. 17 13:58 작성2023. 03. 06 10: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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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de movie]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2008 스티븐 돌드리 감독

독일 연방대법원과 연방헌법재판소가 있는 카를스루에의 중앙역. 1913년에 지어졌다. 독일어로 HBF는 중앙역(Hauptbahnhof)을 뜻한다. 독일 자동차 아우디 광고가 붙어있다. /이범준 작가 제공

로드무비는 앞으로 6차례에 걸쳐 이범준 작가가 세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만난 이야기를 싣습니다. 이범준 작가는 이들을 인터뷰해 초국적 시대의 인권에 관한 글을 경향신문에 연재했습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원작은 독일 소설이다. 원작 소설 제목은 낭독자(Der Vorleser), 소리 내어 읽는 사람이다. 일본에서도 소설 제목을 낭독자(朗読者)로 번역했다. 영화는 글을 모르는 독일 여성 한나(케이트 윈즐릿 연기)가 이를 숨기려 나치 친위대에 들어가게 되고, 전쟁이 끝나고 받는 전범재판에서도 문맹을 숨기려 죄를 뒤집어쓴다는 내용이다. 한나는 글을 모르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지만, 나치에 부역한 것에는 죄책감이 없었다. 교도소에서 글을 깨치지만, 출소를 앞두고 목숨을 끊는다. 글을 읽게 되면서 오랜 수치심이 사라졌지만, 그로 인해 비로소 죄책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전범재판이 소설과 영화의 소재이며 죄책감과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배경도 독일이다. 원작자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독일 헌법학자이고 주(州)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냈다.


독일에 카를스루에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헌법재판소, 한국현대사를 말하다>를 쓰던 2009년에 처음 알았다. 가령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신행정수도 근거법에 위헌을 결정한 사건 주심 이상경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당초 군주가 존재하는 데가 수도였다. 그러다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더해져, 국회와 통치권자가 있는 곳을 수도로 보게 됐다. 사법부는 사후견제 기능밖에 없어 수도개념에 해당이 없다. 독일만 해도 연방대법원과 연방헌법재판소는 수도 베를린이 아닌 카를스루에에 있다." 이런 식으로 카를스루에라는 독일 도시 이름을 자주 들었다.


인구 30만여 명인 카를스루에는 프랑스 접경과 가깝다. 프랑스 경계까지 4킬로미터다. 수도 베를린에서는 고속도로로 67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렇게 변방에 헌법재판소(BVerfG)를 비롯한 연방사법기관이 있는 이유는 무얼까. 손인혁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재판소 연구관이던 2013년 법률신문 칼럼에서 중앙 정치권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1951년 설립 당시 서독 수도 본과 거리를 두어 정치권에서 독립성을 확보하고, 1950년 카를스루에에 자리 잡은 연방대법원(BGH)과도 협력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두 사법기관은 앞서 1949년 공포된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 따라 설치됐다. 시간이 흘러 1990년 독일이 통일하자 사법기관들을 새 수도 베를린으로 옮기자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중앙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많아 이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 리더>를 보고 10년이 지난 2018년 겨울 카를스루에에 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차를 탔다. 연방헌법재판소는 카를스루에역에서 큰길을 따라 북쪽으로 2킬로 거리에 있었다. 나는 숙소를 열차역과 재판소 중간에 구했다. 카를스루에역에 도착하니 오후 7시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가까운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점원에게 메뉴를 추천받아 프랑크푸르터(Frankfurter)와 커피를 시켰다. 나온 음식은 미국에서 핫도그로 부르는 것이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을 보면, 독일 이민자들이 1860년대 미국 뉴욕으로 이 음식을 가져갔다고 한다. 허리가 길쭉한 독일 개 이름을 붙여 닥스훈트 소시지라고 불렀는데, 이게 다시 핫도그로 바뀌었다. 그래서 핫도그 원조는 미국 뉴욕이고, 프랑크푸르터 원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다. 카를스루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는 고속철도로 66분 걸린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휴게실에 걸린 역대 헌법재판관 사진. 독일 헌법재판소에는 재판관 8명이 참여하는 재판부가 2개 있다. 연방상원과 연방하원에서 절반씩 선출하며 임기는 12년이다. /이범준 작가 제공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휴게실에 걸린 역대 헌법재판관 사진. 독일 헌법재판소에는 재판관 8명이 참여하는 재판부가 2개 있다. 연방상원과 연방하원에서 절반씩 선출하며 임기는 12년이다. /이범준 작가 제공


이튿날 처음으로 카를스루에를 달렸다. 숙소에서 500미터를 달리니 연방대법원이 나왔다. 민사와 형사를 담당하는 연방최고법원이다. 요즘은 연방일반법원이라고도 번역한다. 독일의 연방최고법원은 5개다. 연방행정법원(BVerwG) 연방재정법원(BFH) 연방노동법원(BAG) 연방사회법원(BSG) 등이다. 연방대법원을 제외한 나머지 연방최고법원들은 다른 도시에 있다. 이들 5개 연방최고법원의 행정은 정부 부처가 맡는다. 가령 연방노동법원은 노동부장관, 연방행정법원은 법무부장관이 담당한다. 이유는 독일에서는 법관 독립과 법원 행정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서다. 이들 연방최고법원 위에 연방헌법재판소가 있다. 연방최고법원들과 달리 정부 부처 감독을 받지 않는다. 연방헌법재판소는 상원, 하원, 대통령, 내각과 함께 독일 5대 헌법기관이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연방대법원은 판사가 153명에 달한다. 12명인 한국 대법관을 크게 늘려야 한다는 주장의 대표적인 근거 사례이다.


카를스루에를 달리면서 그간 읽어온 독일 판례의 생산지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리고 이날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주자네 베어(Susanne Baer) 재판관을 만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법학자이다. 나도 그가 집필한 헌법교과서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 훔볼트대 법대, 미국 미시간대 로스쿨 교수였다. 비교헌법과 젠더법을 가르쳤다. 앞서 베를린자유대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시간대 로스쿨에서 법학석사(LL.M.)를 받았다. 베어 재판관 같은 학자 출신이 독일 헌법재판관의 다수다. <더 리더>의 원작자 베른하르트 슐링크도 학자이자 헌법재판관이다. 이처럼 학자가 많은 이유를 베어 재판관은 "헌재가 개소할 당시 법관은 나치에 부역한 경우가 많아 학자를 주로 구성한 것이 연원"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독일에서는 교수가 되기 어렵고 그래서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높다. 베어 재판관의 12년 임기는 2011~2023년이다. 그리고 독일 최초의 동성애자 재판관이다.


독일 헌법재판소에는 재판관 8명이 참여하는 재판부가 2개 있다. 1 재판부는 기본권 사건을 맡고, 2 재판부는 국법 사건을 전담한다. 홀수가 아닌 짝수로 재판부가 구성된 점이 눈에 띈다. 한국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은 9명이고, 일본 최고재판소 재판관도 15명으로 홀수다. 표결로 결론을 내기 위한 숫자다. 반면 독일 헌재는 8명이다. 합의를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은 유럽에서는 예외적으로 소수의견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내는 경우는 드물다. 가능하면 소수의견을 내지 않는다. 토론을 거듭해 단일한 의견을 만든다. 이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독일 헌재 의견이 예리하지 않게 보인다. 여러 사람이 합의에 이르려면 구체적이고 예리한 부분들을 각자 포기하기 때문이다. 독일 입장에서는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이 여차하면 소수의견을 내기 때문에 토론이 얕다고 한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주자네 베어 재판관이 2018년 나와 인터뷰를 마치고 자신의 저서를 설명했다. /이범준 작가 제공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주자네 베어 재판관이 2018년 나와 인터뷰를 마치고 자신의 저서를 설명했다. /이범준 작가 제공


한국 헌법재판소는 소수의견을 밝힌다는 점에서는 미국식이지만 그 의견에 가담한 사람만 적을 뿐 미국처럼 그 의견을 누가 썼는지는 표기하지는 않는다. 베어 재판관은 재판관 짝수 구성이 재판관 연임 금지와 함께 독일의 현명한 제도라고 했다. "재판관 수가 짝수인 것은 확실한 다수에 이르도록 자극하는 시스템입니다. 독일 헌법재판관은 임기 12년에 중임이 불가능합니다. 입법기관인 연방의원 임기(4년)보다 길지만 (미국처럼) 종신이 아닙니다. 종신이라면 너무나 큰 권력이 됩니다. 중임이 안 되기 때문에 재판관이 독립적입니다. 새로운 임기를 염두에 두면서 재판할 우려도 없습니다. 재판관 의견이 4 대 4라면 결론은 위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법부가 옳다는 명백한 결정입니다. 위헌이 다수가 아니니까요. 찬성과 반대 의견이 모두 나갑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재판관들이 토론을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에서 21세기의 난민 문제는 중요한 시험대였다. 2010년대 들어 유럽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난민이 몰려들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5년 국경을 열어 난민 100만 명을 받았다. 난민에 대한 찬반으로 독일 내부는 갈렸다. 난민을 받아들여 부족한 노동력을 해소해야 한다는 사람과 극심한 외국인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난민에게 너그러운 것으로 알려졌던 독일인이 포용력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도덕과 정치가 만나는 전형적인 헌법 문제가 독일의 난민 문제였다. 베어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난민 문제에 관한 독일 헌법재판소의 중요한 판단으로 2012년 결정이 있습니다. 망명신청자에게 지급하는 현금 등 혜택을 1993년 이후 증액하지 않은 망명신청자서비스법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 존엄성은 국가 정책에 따라 달라질 수 없습니다. 독일에 있는 누구도 굶주리거나 고립되면 안 됩니다. 생존의 최저 수준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난민범죄로 반대 여론이 들끓으면서 메르켈 총리가 정치적 어려움에 부닥치기도 했다. 난민 문제는 독일과 유럽을 여전히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베어 재판관의 입장은 확고했다. "2012년 결정 이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일과 유럽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난민들에게 혜택을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현금이나 쿠폰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거처는 얼마나 외지지 않아야 하는지 등을 논의 중입니다. 유럽인권협약과 독일 헌법이 얽힌 문제입니다. 현재 독일 헌법재판소에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사건이 들어와 있어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헌재 결정은 정치적 결정의 한계를 정하게 됩니다. 헌재가 정하는 독일에서의 한계는 독일의 정치적 결정은 물론 유럽의 정치적 결정도 충족시켜야 합니다." 독일에서 난민의 최저 권리는 독일 헌재가 정하며, 여기에 대해 독일 의회나 유럽의회가 거부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강 아이제르너 다리(Eiserner steg). 번역하면 철제 보도교(Iron Footbridge)라는 밋밋한 이름이다. 이 다리를 자주 그린 화가로 20세기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막스 베크만이 있다. /이범준 작가 제공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강 아이제르너 다리(Eiserner steg). 번역하면 철제 보도교(Iron Footbridge)라는 밋밋한 이름이다. 이 다리를 자주 그린 화가로 20세기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막스 베크만이 있다. /이범준 작가 제공


카를스루에에서 서울로 가려면 프랑크푸르트로 나가 비행기를 타야 한다. 프랑크푸르트에 있으면서 마인강을 달렸다. 마인강 다리들 가운데 아이제르너 다리(Eiserner steg)가 유명한데, 번역하면 철제 보도교(Iron Footbridge)라는 밋밋한 이름이다. 이 다리를 자주 그린 화가로 막스 베크만이 있다. 베크만은 1930년대 나치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근대미술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주장하던 나치는 베크만 작품을 500점 넘게 몰수했고, 나치가 블랙 리스트에 올린 작품전인 <퇴폐 미술전>에도 10점 포함했다. 베크만은 193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도망했다가 194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50년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에 그의 작품들이 있다. 베크만의 자화상이 독일 경매 사상 최고가인 2000만 유로에 2022년 팔렸다. 나치 피해자 베크만의 자화상을 거액에 사들이는 손과 연방헌법재판소의 난민 보호 결정을 비난하는 입 사이에 사람의 수치심과 죄책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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