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간첩이라 죽였다" 남편의 거짓말, 국가가 진실로 만들었다
"아내가 간첩이라 죽였다" 남편의 거짓말, 국가가 진실로 만들었다
가정폭력에 희생된 여성을 북한 공작원으로 둔갑시킨 5공화국 안기부
공소시효 50일 남기고 살인범 기소
진실 밝혀졌지만 책임자는 처벌 못 해

1987년 홍콩에서 남편에게 살해당한 수지 킴 씨. 그러나 당시 정권과 안기부는 사건을 조작해 그녀를 간첩으로 몰았다. /셔터스톡
남편의 폭력에 목숨을 잃은 한 여성이 국가 권력에 의해 희대의 간첩으로 내몰린 사건이 있다. 1987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수지 킴 사건'이다.
살인범은 반공투사로 영웅이 됐고, 피해자 유가족은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평생을 고통받았다. 한 개인의 죽음을 정권 안보의 도구로 삼았던 국가 범죄의 전말을 26일 YTN 라디오 '이원화 변호사의 사건X파일'에서 들여다봤다.
가정폭력 살인, '납북 미수' 간첩 사건으로 탈바꿈
사건은 1987년 1월 3일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시작됐다. 남편 윤태식은 아내 김옥분(가명 수지 킴)씨와 말다툼 끝에 목을 졸라 살해했다. 김씨가 남편의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린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아내를 살해한 윤태식은 시신을 침대 밑에 숨긴 채 싱가포르로 달아났다. 김연준 변호사(로엘 법무법인)에 따르면, 그는 싱가포르 주재 북한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에 잇따라 망명을 시도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주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넘겨진 윤씨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아내 김옥분이 사실은 북한 간첩이었고, 자신을 납북하려 해 격투 끝에 살해했다"는 황당한 거짓말을 꾸며냈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개입으로 '사실'이 됐다. 김연준 변호사는 "당시 안기부장 장세동의 주도 하에, 윤태식의 살인 사건이 '북한 공작원이 해외 주재원을 납북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조작됐다"고 설명했다.
1987년은 전두환 정권 퇴진 요구가 거셌던 시기.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대형 공안 사건이 필요했던 정부의 이해관계와 살인죄를 벗어나고 싶었던 윤태식의 욕망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언론은 윤씨가 북한 대사관의 문을 먼저 두드렸다는 사실은 쏙 뺀 채, 그를 납북 위기에서 탈출한 반공투사로 포장했다.
살인범은 '벤처 영웅', 유가족은 '간첩 가족'으로
안기부 요원들의 호위 속에 귀국한 윤태식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이후 지문 인식 관련 벤처 기업을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로 승승장구했고, 대통령 앞에서 기술 시연을 하기도 했다.
반면, 피해자인 김옥분씨와 유가족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김씨에게는 희대의 여성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고, 유가족은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안기부는 유가족을 거칠게 조사했고, 형제자매들은 직장을 잃거나 이혼을 당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딸이 간첩으로 몰린 충격에 실어증을 앓다 10년 뒤 세상을 떠났다.
홍콩 경찰이 김씨의 시신을 발견하고 윤태식을 유력 용의자로 지목해 소환을 요청했지만, 한국 외무부는 이를 묵살했다.
뒤늦은 단죄, 그러나 주범은 처벌받지 않았다
진실의 실마리는 다른 곳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반공투사' 윤태식은 사업을 하면서 여러 사기 범죄에 연루돼 구치소를 드나들었고,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결국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불과 50일 앞두고 윤태식을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홍콩 정부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를 통해 그의 살인 범행과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 사실을 밝혀냈다. 윤태식은 살인 및 별건 사기 혐의 등으로 항소심에서 징역 15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사건을 조작하고 한 가족의 삶을 파괴한 당시 안기부 관계자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직권남용 등의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김연준 변호사는 "국가 권력이 조직적으로 남용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폐지하거나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다"며 아쉬움을 남겼다.
간첩 누명을 벗은 김옥분씨의 유해는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홍콩에서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탓이다. 유가족은 김씨가 다른 무연고자들과 함께 묻힌 묘지의 흙을 가져와 어머니의 묘소에 뿌리는 것으로 모녀의 슬픈 재회를 대신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