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공모" vs. "술자리 대화" 3분간의 짧은 대화를 둘러싼 논란의 진실
"살해 공모" vs. "술자리 대화" 3분간의 짧은 대화를 둘러싼 논란의 진실
옆 방 지인들이 나누는 의심스러운 대화를 휴대전화로 녹음
정당행위 주장하는 피고인⋯ 그 대화는 살인을 계획한 게 맞았을까

한 남성이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를 녹음했다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남성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그 대화를 녹음했다고 주장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4월 8일 동해안의 한적한 바닷가. 짙은 어둠이 내린 가운데 외따로이 서 있는 펜션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방화를 했는지, 안 했는지 이거지. 아크(전기방전)를 막 이렇게 전기불꽃이 팡팡팡팡 했는데 그걸 일부러 그랬다는 게 아니라 전기누전으로 인했다는 이렇게 가는 것이지."
"전소(全燒⋅모두 탐)돼야, 완전히 전소돼야 그게 모두가 증거가.."
"CCTV도 갑자기 안 돼도 갸(걔)는 의심을 한다는 거지...불이 발화되는 게 어디서 발화가 됐는지 뭐."
"내가 표 안 나게 해줄게."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서 사장님 저기 돼 있다는.. 우리 막 사식 넣어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적막을 타고 4명의 은밀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굳게 닫힌 101호 방문 너머는 흡사 방화(放火) 모의 현장 같았다. 순간, 옆 방에서 한 남성이 두려움에 떨며 슬며시 나왔다.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101호 방문 앞에 꺼내 놓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지난 25일 열린 서울동부지방법원 국민참여재판에서 나온 녹취록과 진술을 종합한 내용이다. 녹취록만 봐서는 그날 펜션 안은 분명한 범행 모의 현장이었다. 그렇다면 재판에 오른 혐의는 살인이나 방화였을까. 아니었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열린 재판이었다.
사건 당일, 펜션에 거주하던 강모(51)씨는 휴대전화의 녹음 기능을 이용해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한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옆방에서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이모(50)씨가 자신의 대화를 몰래 녹음했다며 강씨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강씨는 휴대전화로 대화를 녹음한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4명이 대화하면서 언급한 불, 발화 등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따라서 쟁점은 강씨의 행동을 정당한 행위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강씨를 두고 살인하려 했다고 의심받는 옆방의 4명, 그리고 정당행위였다는 피고인 강씨.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먼저 밝혀져야 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강씨가 녹음한 2분 50초 분량의 짧은 녹음 파일이 핵심 증거가 됐다. 이 때문에 이날 재판정에서는 이 녹음 파일이 여러 차례 재생됐다. 처음엔 원본 파일이 재생됐다. 목소리보다 잡음이 더 컸다. 그래도 '불꽃' '아크(전기방전)' '전소'와 같이 '불'과 관련된 단어들이 드문드문 들렸다.
검찰은 이 음성파일에서 사람 목소리만 증폭시켰다고 했다. 그 음성파일도 재생됐다. "내가 표 안 나게 해줄게"라거나 "사식을 넣어준다는 말"이 들렸다. 피고인이 '나를 죽이고 교도소에 간다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 말들이었다.
앞서 녹취록에 나온 문장들이 녹음된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음성파일을 들은 배심원들의 표정은 묘했다. 활자로 정리한 녹취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대화 분위기'기 지나치게 시끌벅적했기 때문이다. 대화 도중 웃음소리가 자주 터져 나왔다.
검사는 이를 두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것일 뿐 살인을 계획하는 자리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강씨를 고발한 이씨와 재판에 나온 다른 증인들의 진술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들은 식사를 겸한 술자리에서 벌어진 대화라고 주장했다. 펜션 소유자이기도 한 이씨는 "(펜션에 불을 내면) 내가 이득 볼 게 없다"며 "(불 이야기는) 그때 틀어둔 텔레비전에서 고성 산불 뉴스가 나와 이야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불을 내 피고인을 죽이고 보험금을 받겠다는 취지로 말한 적 있나"고 묻는 변호인의 질문에 대해서도 "불을 낼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다른 증인 또한 "'펜션 주인'인 이씨는 펜션 운영 수익으로 먹고 사는데 어디서 돈을 벌고 사느냐"고 주장했다. 불을 낼 동기가 없었다는 주장이었다.
피해자 이씨는 강씨와 과거 동거했던 연인 사이였다. 그래서 이씨 소유의 펜션에서 함께 살았다. 두 사람은 사실혼에 가까운 관계였던 적도 있었지만, 최근엔 소원해졌다고 했다. 이날 재판에 나온 한 증인은 "이씨를 향한 '집착'이 불법 녹음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연인을 감시하기 위해 녹음을 한 것이라는 의미다.
강씨는 이씨의 차량에 위치추적기를 달아 지난 6월, 3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한 일이 있다. 이씨는 그 외에도 강씨에게 고통받은 여러 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씨는 "(피고인은) 폭력성이 강했다"며 "나이가 있으니 안정적인 삶을 찾으려 저 사람을 만났는데 한 번이라도 마음속으로 사랑을 줘본 적이 없다"고 속상함을 표현했다.
증인 또한 "(둘의) 사이가 너무 안 좋았다, 싸우다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며 피고인과 피해자가 갈등을 겪었음을 나타냈다.

판결을 앞두고 피고인의 변호를 담당한 최익구 변호사는 이번 녹음 행위가 정당행위가 맞다고 강조했다. '전소'와 같은 단어는 단순히 술자리 농담으로 볼 수 없는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대화라는 이유에서다. 그 말을 듣고 위협을 느낀 피고인이 휴대전화로 급하게 녹음했다는 입장이었다.
최 변호인은 "과연 우리가 섬뜩한 대화가 들리는 현장에서 달리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입장 바꿔 생각해달라"며 "이 상황에서 목격자를 찾거나 112에 신고해 출동을 기다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도 고려해달라"고 말하며 정당 행위를 주장했다.
3분 남짓한 시간에 두려움을 느낀 피고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휴대전화 녹음뿐이라는 설명이었다.
이어 판결이 시작됐다.
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손주철 부장판사)는 피고인 강씨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녹음행위가 불법이라는 판결이었다. 배심원(7명) 역시 만장일치로 강씨의 녹음 행위는 정당행위 아니며 따라서 유죄라고 결론 내렸다. 그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이 재판에 앞서 강씨는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경찰에 고소했다. 자기를 죽이려고 방화음모를 저질렀다는 혐의였다. 하지만 경찰은 무혐의 처분을 했다. 대화에 웃음소리가 포함된 것으로 볼 때 이것만으로는 범죄를 입증하기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이 결정은 이번 재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사기관이 "방화음모가 아니다"고 했으니, 이를 기반으로 한 '정당행위' 역시 인정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더해 강씨가 문제의 대화를 녹음한 지 2주 만에 신고했다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면 곧바로 신고했을 거라는 취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