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지 못할 아이들을 옭아맬 덫을 놓다⋯치밀하게 ‘기획’된 그루밍 범죄
반항하지 못할 아이들을 옭아맬 덫을 놓다⋯치밀하게 ‘기획’된 그루밍 범죄
[로톡뉴스 기획 취재] 그루밍 범죄의 민낯 ③
'그루밍 성범죄' 전수 조사⋯판결문 속 4가지 공통점

로톡뉴스는 최근 3년간 나온 판결문을 전수조사했다. 유죄 판결이 난 13건의 사건들에서 공통점들이 보였다. 기사 내용과 관련 없는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은 '내가 지금 범죄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법무법인 온세상의 김재련 변호사는 이를 "성적 자기결정권을 자발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단계에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상적인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김재련 변호사는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라고도 표현했다. 판결문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피해자가 그렇게 된 것은 가해자들이 '공들여 만든 덫'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피해자의 주거지에 보호자가 없고, 피해자의 나이가 어려 판단력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이용해..."
그루밍 성범죄에 우발적인 사건은 없었다. 판결문 곳곳엔 범행이 치밀하게 계획되었다는 점이 확인됐다.
가해자는 범죄를 ①비밀리에 ②지속할 방법을 애초부터 계획했다. 그래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보호자의 보살핌이 덜한 피해자들을 골랐다. 견고한 보호막이 있는 아이들은 범죄대상에서 제외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물망에 올렸다.
가해자 C씨는 배드민턴장에서 D양(13세)을 만났다. 배드민턴을 같이 치면서 D양의 부모가 이혼했고,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몇 번 더 만나면서 "D양이 주중에는 어머니 집에서, 주말에는 아버지 집에서 지낸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D양 부모 모두는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웠다. C씨는 그 점을 노려 '숙제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D양 집에 들어갔다. C씨는 D양과 자주 만나면서 신뢰와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성범죄가 시작됐다. 법원이 인정한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C씨는 D양 집에 아예 '콘돔 박스'를 갖다두고 1년 반 동안 본격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면서 D양이 다른 사람과 연락하지 못하도록 했다. 성적착취를 지속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C씨는 D양이 다른 동급생과 연락을 하면 폭행을 휘둘렀다. 누군가를 만날 때 필요한 현금도 빼앗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D양을 자기 집에 데려와 동거까지 했다.
다른 사건의 가해자 E씨도 비슷하게 피해아동들에게 접근했다. B씨는 초등학교 저학년인 피해자들이 자주 찾는 단골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목표'를 발견하면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환심을 샀고,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친분을 쌓았다.
분석 대상이 된 사건 중에는 재판부가 피해자의 신체적 특징을 묘사한 경우가 있었다. 해당 재판부는 피해자가 "신체의 외형이 전형적인 아동의 특성을 보였다"고 판결문에 썼다. 또래에 비해 신체가 덜 발달해, 작고 연약한 체형을 가졌다는 취지였다. 가해자들은 이런 아동을 골라 범죄를 저질렀다.
"싫어요."
13건의 그루밍 성범죄 판결문에서 확인한 네 번째 공통점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제대로 반항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범죄를 당하기 직전에 "싫다"고 말하는 정도가 가장 거센 축에 속하는 반항이었다.
전문가들은 "그루밍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한 상태였기 때문에 반항해야겠다는 판단조차 하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의존 상태가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던 건, 피해자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가혹한 성적 착취를 당해도, 마음 편히 이야기할 대상이 없었다.
많은 판결문에서 피해자 가정의 특징을 "가정 내 소통이 끊어져 있었다"고 표현했다. 아니면 "피해아동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피해자를 제대로 돌볼 여력이 없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성적 착취를 당한 피해자들은 이내 자포자기 상태가 됐다. 이 상태에 이르면 외견상 '자발적으로 관계에 응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가해자들은 법정에 서면 이 점을 변론 포인트로 삼았다.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는 근거로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요청해도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피해자는 범행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나는 내가 죽어있는 시체 같았다"고 말했다. 모텔에 끌려가 침대에 누웠을 때 미동조차 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다.
피해자가 반항을 하지 못하면서 범행은 지속됐다. 그러다 보니 그루밍 성범죄 중엔 일회성에 그친 사건이 없었다. 길게는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성적 학대가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