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죄 성립에 '항거불능 폭행·협박 있었나'란 질문, 필수적이어야 하나
강간죄 성립에 '항거불능 폭행·협박 있었나'란 질문, 필수적이어야 하나
핵심은 기계적 요건 충족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종합판단설' 재해석한 2004고합228 판결의 의미

여성의 정조는 ‘목숨을 다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폭행·협박의 정도와 저항 여부만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게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 이미지 출처 : 셔터스톡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일찍부터 강간죄 성립에 대한 통설인 ‘최협의 폭행·협박설’에 반대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협의설이 말하는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유형력 행사로서의 폭행·협박’은 강간죄 해당 범위를 가장 협소하게 해석한다.
우리 법원은 이러한 최협의설과 함께 이른바 ‘종합판단설’을 취하여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살피고 있다. 조 후보자의 논문 ‘강간죄 및 미성년자 등에 대한 위계간음죄 재론(2016, 형사법연구)’에 따르면, 대법원은 1992년 92도259 판결 이후 일관되게 종합판단설을 제시하고 있다.
종합판단설이란 ‘유형력을 행사한 당해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최협의의 폭행·협박에 해당하는지 판단’한다는 내용이다.
조 후보자는 앞의 논문에서 “‘종합판단’의 이름 아래, 피고인과 피해자가 사건 발생 이전에 술을 같이 먹었다던가, 춤을 같이 추었다던가, 여관에 같이 들어갔다던가, 또는 이전 합의 성교의 경험이 있었다던가 등의 일이 있으면, 피해자의 진술은 품행이 방정하지 않은 사람의 진술로 의심한다”며 종합판단설을 비판했다.
나아가 종합판단설은 “피해자의 저항이 있었는가”라는 새로운 잣대를 하나 더 제시하는데, 최협의설 자체는 피해자의 저항 여부를 따지지 않지만 종합판단설은 이를 핵심적 판단 기준으로까지 삼고 있다.
우리 판례와 학계가 취하고 있는 최협의설 및 종합판단설은, 한국 형법이 강간죄의 감경적 구성요건을 정하지 않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법원은 감경 구성요건도 없는 죄의 적용 범위를 좁히면 좁힐수록 피고인의 인권 보장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 왔다.
하지만 이는 선진적인 ‘비범죄화’가 아닌, 무책임한 ‘과소범죄화’라는 것이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지적이다.
항거불능의 폭행·협박에 이르지 않는 정도의 유형력 행사를 통해 강간죄를 범한 경우들도 법이 규율해야 하는데, 규범의 공백으로 인해 그런 사안들이 법망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법원이 강간죄 판단에서 ‘폭행·협박’이라는 행위 태양과 그 해석만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도 문제라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가’라는 강간죄의 핵심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기계적인 요건 충족 여부만 핵심인 것처럼 자리를 꿰찼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 법과 법원이 강간죄를 바라보는 시선의 중심에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래 강간죄의 해석 태도는 실제로 기계적인 요건 충족 여부만을 강간죄의 핵심으로 여겼으며,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에는 관심이 없거나 미미했다.
이는 2013년 아내강간죄 성립을 처음 인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2도14788, 2012전도252)에서도 언급된다.
1953년 제정된 형법은 강간죄를 제2편 제32장 ‘정조에 관한 죄’에 속하는 것으로 편제했는데, 1995년 형법을 개정하면서 제32장의 제목을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꾸었다.
전합체 판결은 이를 들어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현재 또는 장래의 배우자인 남성을 전제로 한 관념으로 인식될 수 있는 여성의 ‘정조’ 또는 ‘성적 순결’이 아니라,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여성이 가지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사회 일반의 보편적 인식과 법감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의 정조는 ‘목숨을 다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폭행·협박의 정도와 저항 여부만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게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사회 일반의 보편적 인식에 눈높이를 맞춘다면, 강간죄 성립에서 폭행·협박의 정도와 피해자의 저항 여부만이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는 건 부자연스럽다.
법원이 문제의식을 전혀 갖지 않았던 건 아니다. 미미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판례에 나타나고 있었는데, 물꼬를 튼 것은 2004년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나온 2004고합228 판결(재판장 박철)이다.
이 사안에서 피고인 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관계는 피해자와 합의하여 가진 것이고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면서 강간한 것이 아니며, 설령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성관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피고인 측은 구체적으로 △피해자가 강간을 당한 후 약 8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야 고소를 하게 된 사정 △피해자가 집을 나와 순순히 피고인과 함께 여관방에 들어간 사실 △1차 강간 후에도 피고인이 구해놓은 집에 입주하였고, 2차 또는 3차 강간 후 피고인과 함께 비디오를 빌리러 갔으며, 피고인과 함께 게임방에 가서 게임을 하는 등 친밀하게 지낸 사실들을 짚었다.
또한 “큰 소리로 구조를 요청하였더라면 구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큰 소리로 구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면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했다.
그간 법원이 취해 온 입장을 고수한다면 이 같은 피고인 측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판결은 달랐는데, 기존의 최협의설 및 종합판단설과는 다른 내용들을 제시하며 주장을 하나하나 물리쳤다.
재판부는 “피해자 반응의 특이성의 형식적 측면만을 들어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가볍게 배척한다면, 이는 복잡하고도 다양한 인간 심리와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무릇 사람들의 반응이 동일한 상황 하에서도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칼로 찌르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뺨을 맞고도 참을 줄 안다. 무섭게 노려보는 것만으로 겁을 먹고 몸이 얼어붙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칼을 든 상대방에게 용감히 저항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어 “많은 범죄사례를 접하다 보면 폭력적 범죄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 더 강한 폭력과 더 큰 피해를 초래하는 사례를 적지 않게 보게 된다. 공포심이 클수록 더 강하게 저항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공포심이 커지면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례도 보게 된다”면서 “성폭력을 당한 것이 모멸적인 경험이 될지언정 피해 여성의 인격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될 수 없는 현 문화 속에서 법과 국가가 성폭력에 직면한 여성들에게 목숨을 건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폭행·협박의 판단과 관련해서는 “외부로 표출된 폭행·협박의 강도와 가해 남성의 범죄적 악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강간죄의 폭행·협박을 판단한다면, 완력으로 여자를 잡고 강제로 여성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기만 한 가해자는 강제추행죄로 처벌되지만, 더 나아가 피해 여성의 옷을 벗기고 강제로 성행위에까지 나아간 가해자는 무죄로 판단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비교적 약한 폭행·협박을 수단으로 타인에게 재산적 피해를 가하는 행위는 공갈죄로 처벌하면서, 왜 비교적 약한 폭행·협박을 수단으로 피해 여성에게 극도의 성적 수치심과 인격적 모멸감을 주는 행위는 무죄라고 해석하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행·협박에 대하여 적극적인 저항이 더 강한 폭행을 초래할 뿐 강간의 피해를 막을 수는 없겠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인 저항을 포기하였고 그 판단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강한 폭행·협박이 실제로는 표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강간죄를 구성하는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에 해당한다”고 설시했다.
조국 후보자는 앞의 논문에서 이 판결의 따름 판례로 2005도3071 판결과 2012도 4031 판결을 들었다. 2005도3071 판결은 기존의 최협의설 및 종합판단설을 그대로 반복한 원심을 파기하고 2004고합228 판결의 취지를 이어갔다.
이어 2012도 4031 판결이 취지를 재확인했는데, 조 장관은 이러한 일련의 판례들을 두고 “향후 대법원이 ‘최협의의 폭행·협박’ 요건을 판단할 때 범행시 소리를 질러 구조를 요청하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다, 범행 후 즉각 타인에게 피해를 호소하거나 고소를 하거나 도주를 하지 않았다 등을 중시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