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20)] 모든 사념 떨치시고 끝까지 매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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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20)] 모든 사념 떨치시고 끝까지 매진하시길!

2020. 08. 12 13:35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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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가 되어 생전 처음으로 사법시험 1차에 응시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가 사법시험에 응시한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감동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 /셔터스톡

1986년 30세가 되어 생전 처음으로 사법시험 1차에 응시했다. 공부한 수준으로는 응시하지 않아야 하는데, 만학도로 입학했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 서두르게 되었다. 3학년이 되면 일단 응시하기 시작하는 법대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공부해야 할 분량이 숨 막히게 많았다. 민법 과목은 다섯 권의 교과서에 3000페이지를 읽어야 했다. 3학년으로는 너무 부담스러워 '민법개론' 같은 분량이 적은 책으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가 사법시험에 응시한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감동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


시험은 오전에 2시간 40분 동안 쉬는 시간도 없이 4과목을 보고, 오후에도 4과목을 같은 시간 동안 연속해서 보아야 했다. 순전히 시험 주관부처의 편의만 고려한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매우 가혹하게 여겨졌다. 아무튼 1분에 1문제를 풀어야 하니까, 순발력과 체력이 필요했다. 어떤 친구는 시간이 부족해서 마지막 과목 몇 문제는 찍었다고 아쉬워하는데, 나는 두 번 이상 검토할 수 있었다. 나는 실력과 상관없이 무슨 시험이든 매우 빨리 푼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고민하고 있지 않고, 즉시 정답을 정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그렇다고 성적이 좋은 건 아니었다.


1981년부터 사시 최종 합격자를 300명으로 증원하였기에 1차 시험 합격자도 700~800명대로 늘어났다. 단 몇십 명에서 100여명 붙이던 시절에 비하면, 1980년대 사시 응시자는 행운의 세대라고 했다. 공직에서 퇴직한 후 대학으로 오신 존경하는 행정법 교수님은 친구인 총무처 장관에게 "사시합격 인원을 한 500명씩 대폭 늘리라!"고 제안하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발 그렇게 인원이 대폭 늘어나기를 기대했다.


여름방학 무렵에 1차 시험 합격자 발표를 했다. 지원자 13,635명 중에서 791명이 붙었다. 서울신문 아래쪽에 게시된 자랑스러운 합격자 명단 속에서 내 이름은 없었다. 나중에 점수를 확인해 보았더니, 헌법 90점, 민법 80점, 형법 75점, 경제학 67.5점, 문화사 60점, 국사 82.5점, 국제사법 87.5점, 독일어 55점으로 평균 74.68점이었다. 커트라인은 79.06점!


비법률 과목이 실력 미달이었다. 법조인 선발 시험에서 법 과목 성적 올리는 것보다 교양과목이 더 어려웠다. 법대 3학년이 떨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실력이 있든 없든 응시한 시험에서 떨어지면 기분이 안 좋았다. 낙방 소식을 전해 들은 어느 선배는 사이다 한 병을 사주면서 다시금 도전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밖에서 헤매다 교문을 들어설 무렵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참담한 마음을 달래주는 빗줄기가 후두득 나무 잎사귀를 때리고 있었다. 힘없는 발걸음이 서둘러지지도 않았다. 마음이 힘들다 보니, 성경에서 보았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모습이 스쳐 갔다. 조롱과 저주 속에 힘겹게 감당한 그 고난을 생각하니, 매번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내게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문득 그때 그분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가서 처음 만나는 학생에게 전도를 하기로 했다. 비가 내리는 날씨 때문이었는지 도서관 로비는 어두컴컴했다. 1층에는 아무도 없어 2층에 올라갔더니, 기둥 저편에 누군가 있었다. 1년 후배였다. 평소 말을 붙여 본 적이 없었음에도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신앙생활을 해보도록 권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그래서 내가 신앙을 갖게 된 계기를 말했고, 오늘 사시에 떨어진 날이라고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법대생이 성경도 좀 알아야 하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 공부를 해보자고 하였다.


그 후배는 내가 그날 낙방한 것이 불쌍해서인지 내 제안을 승낙해 주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았던 게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의 소개로 또 다른 후배에게도 성경을 가르쳤다. 물론 나도 매주 성경을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중심으로 전하는 거라서, 딱히 가르친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내년에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3학년 2학기에 생각하지도 못한 일에 시간을 쏟고 있었다. 그렇게 가을을 바쁘게 지낸 후 4학년을 맞이했다. '재학 중 절대 합격'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도 1차는 반드시 붙어야 했다.


1987. 4. 16. 일기
얼마 전까지는 밤 공부를 마치면서 내일을 위해서 더하고 싶은 욕심을 누르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피곤해서 못하겠다 하면서 하루를 마치고 있습니다. 불타는 합격의 신념과 새 힘을 허락하여 불철주야 정진토록 하옵소서! 마음껏 부풀린 봄의 향기를 외면하고 나의 좌석을 지키는 이 순간을 값있게 하시고, 일생동안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으로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제껏 인도하신 대학에서 마무리를 잘하도록 축복하여 주시고 부족한 자로 인하여 큰 영광을 받으소서!


새벽 동이 터 올 때까지 공부를 하고, 두어 시간 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는 날이 계속되었다. 밤마다 조그만 더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야지 하는데, 어느 순간 창밖이 환해져 누가 가로등을 켰나 하고 창문을 열어보면 동이 트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는 어느 순간의 피곤함을 견뎌내면, 그다음에는 정말 편안한 상태로 공부가 잘되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한숨도 안 자면 안 될 거 같아 5분 후에 일어나려고 시계를 맞춰두고 침대에 누웠는데, 신기하게도 초침이 정각에 가면 눈이 떠졌다. 이런 초인적인 의지의 능력을 많이 경험하였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을 만큼 부지런히 한 거 같았다. 1차 시험이 임박하자 법대 학생회에서는 아래와 같은 격려의 글을 돌리면서 합격을 기원해 주었다.


당시 법대 학생회에서 나눠준 격려의 글. /정형근 교수 제공
당시 법대 학생회에서 나눠준 격려의 글. /정형근 교수 제공


1987년 대학 마지막 학년에 응시했던 1차 시험은 매우 쉽게 출제되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의 얼굴은 해방감 이상의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시험장을 나오는데, 나도 잘 본 거 같은데도 마음이 무거웠다. 선배를 따라 신림동 고시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어느 교회에 가서 낮에 드리지 못한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목사님은 전두환 독재정치로 치닫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시험을 마친 후라서 다소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법대생들끼리 대학 본관 앞에 모여,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사법시험 합격을 위한 기도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그런 날들 속에 도서관 고시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예상 점수를 매겨보았다. 당락을 점칠 때면, 왠지 허전한 심정이 밀려왔다. 시험 본 후에 마음이 뭔가 허전하면 좋은 결과가 안 나왔다. 얼마 후 합격자 발표에서 쉽게 출제된 탓인지 커트라인이 대폭 올라 84.06점이었다. 지원자 14,252명 중에서 732명이 합격했다. 나는 또 떨어졌다. 법대 입학할 때 재학 중 절대 합격하자고 다짐했는데, 1차도 못 붙은 상황이 되었다. 학교의 운동장 구석 나무 그늘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절망감에 젖었다. 내 곁에는 커트라인에서 단 1문제 차이로 4년 동안 연속 떨어진 선배도 있었다. 우리는 이번에 꼭 붙었어야만 했던 사정을 토로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6문제 차이로 떨어졌기에, 한 문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그 선배가 부러웠다.


마음이 힘들어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친구 심수명(현재 한밀교회 목사)에게 매우 늦은 밤에 전화를 걸었다. 위로를 받을까 싶어서였다. 그는 늘 물심양면으로 나를 돕던 친밀한 사이였다. 심야에 안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나에게 그는 성경 한 군데를 읽어주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131).


나는 성경을 읽어주던 그 친구에게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내가 고시 보는 게 교만하고 오만한 거냐? 내가 고시 붙으려고 하는 것이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냐고? 시험 몇 번 떨어졌다고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에게 저 성경 구절을 읽어준 것은, 이제 고시 그만 보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자 그는 당황하여 "형근아! 형근아! 내 말 들어봐!" 하면서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 말로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 괜히 위로받으려고 전화했다가 기분만 상했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집어 던지듯 끊었다.


"하긴 신대원생이 고시생의 괴로움을 어떻게 알겠어!"


스스로 위로했다. 그리고 숙소로 터벅터벅 돌아가 일기장을 폈다.


1987. 6. 26.
한밤중에 쓰는 글. 오늘 슬프고도 괴로운 날에 다시는, 다시는 이 외로움과 부끄러움을 당치 않고자 천근보다 무거운 필을 든다. 패자의 서러움을 하늘 아래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누가 나를 딱하고 불쌍타 하지 않겠는가! 분함이 억울함이 앞서지만, 한없는 무능함을 깨닫지만,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밤을 깨우는 나의 몸부림이 결코 의미 없게 하지 않아야 하는 당위성 앞에 이를 악문다.


사람들 앞에 내가 부끄러웠다. 내 자신에게도 부끄러워 한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다. 그토록 고시의 벽이 두꺼운 줄 몰랐다. 함께 시험장에 갔다가 합격한 동료들은 임박한 2차 시험공부를 한다고 한껏 폼을 잡고 다니는 모습이 몹시 부러워 보였다. 낙담한 마음으로 괴로워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해 7월 9일은 이한열 열사의 장엄한 장례식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군부독재도 무덤 속으로 묻히기를 기원했다. 내 앞길도 막막했지만, 군사정권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암담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가을이 깊어지자 교정에는 노란 은행잎이 차가운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졌다. '저런 나뭇잎도 1년의 할 일을 다 하고 떨어지는데, 나는 여전히 이룬 것 하나도 없이 내년 새봄을 기다려야 하는구나'하는 고통 속에서 보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어 고개를 처박고 도서관만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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