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22)] 시험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형근 교수 에세이 (22)] 시험은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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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덜 떨리는 손길로 기름 냄새가 풍기는 신문을 휙휙 넘겼다. 총무처장관 명의의 "제34회 사법시험 및 제10회 군법무관임용시험 제2차시험 합격자발표"가 눈에 들어왔다. 명단엔 수험번호와 이름이 있었다. 합격이었다. /정형근 교수 제공
1990년 3월 말을 보내면서 다가오는 2차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깊었다. 그 원인은 부족한 공부량이었다. 대충 헤아려 보니 국민윤리 1회독, 헌법 2회독, 행정법 4회독, 상법 4회독, 민법(上)은 1회독, 민법(下)는 2회독, 민법연습은 1회독, 형법총론 2회독, 각론 1회독, 형소법 4회독에 불과했다. 기존에 사법시험 2차 과목이었던 '국사'를 빼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의 정신 개조를 해야 한다며 '국민윤리'를 넣었다. 공부해야 할 건 많고 마음은 급했다.
시간이 갈수록 온갖 사념을 걱정의 보따리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시험장에서 너무 긴장하여 제대로 문제를 작성할 것인가도 걱정되었다. 긴장할 때면 손이 떨리고 글자가 흐려진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차 합격 후 다음 해 2차에 곧바로 합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걱정거리에 추가되었다. 특히 나는 1차를 4번 만에 겨우 통과되었기에 그런 염려는 컸다. 또 내 나이가 34세라서 이번 시험의 결과가 장래를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으리라는 현실도 무겁게 다가왔다.
4월로 접어드니 교정에는 만발한 벚꽃으로 봄이 가득했다.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어서 빨리 인생의 봄을 맞이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였다. 비가 내리자 화창한 벚꽃이 길바닥에 눈처럼 내려앉았다. 학장님의 배려로 장학금 50만원을 받았다. 그 무렵 교회가 건축을 한다고 하여 40만원을 헌금하였다. 예정대로 국민대학교에서 2차 시험이 진행되었다. 2차 시험은 시험문제지를 수험생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었다. 두루마리에 문제를 기재하여 칠판에 붙여놓았다가, 시작 시간이 되면 그 두루마리를 펼치는 방식이었다. 나는 교실 맨 뒷자리였는데, 칠판에 붙여진 두루마리 문제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나빠져 있었던 것을 모르고 지내왔던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결국 2차에 실패하였다.
9월 14일 금요일
제가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말았군요. 대명학원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확인했으나 제 번호는 빠져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이 공간을 메꾸는 것이 좋을런지요. 제 인생이 다시 원점에 서버렸습니다. 아무래도 민소법 과락이 패인인듯싶습니다. 이제 또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슬프고 외로운 길일지라도 홀로 가야 하는 이 길에 안내자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훗날 이 고통의 순간은 아름다운 추억의 순간으로 남게 될 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속히 마음을 잡고 새 방향의 길로 매진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라는 찬송이 새삼 가슴을 저미어 옵니다. 은혜 주옵소서!
학장님께서 매월 10만원을 장학금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하셨다.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마음의 고통도 깊어 왔다.
10월 16일 화요일
어머니! 당신이 세상 떠난 지 7년이 되어갑니다. 우리의 만남은 괴로운 것이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저의 마음속에 사무치는 당신께 향한 정 때문에 망설여집니다. 지금쯤은 백골로 변해 있을 당신의 생전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립습니다. 굵은 손마디가 저의 손을 덥석 잡을 때 따스한 체온이 마음을 녹이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따스한 당신의 손길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고 생전에 느꼈던 온정은 당신의 심장 부위에 조금 남아 있던 잔인했던 그 날 아침이 엊그제 같습니다. "형근이 네가 고시 붙은 걸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눈을 감고 죽지 못하실 것"이라는 생전의 말씀처럼 부릅뜬 두 눈에 허공을 휘젓는 당신의 굳어버린 손이 슬프게 눈에 어립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은 이 가을에 지는 낙엽도, 푸르른 하늘도,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느끼지 못하고 무산되어 버린 2차를 안타까워하면서 다시금 인생의 여정을 다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생존해 계신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당신 없는 이 세상은 어둡기만 합니다. 이제 저는 고난과 맞서 싸우는 기계와도 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청운의 꿈을 펼 장래가 아니라 죽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극한투쟁으로 변해 버린 현실을 사랑하며, 슬프면 홀로 울고 외로우면 당신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렵니다. 당신 가신 후에 이 아들은 하나님을 믿었지요. 모진 고난으로 뜨거웠던 첫사랑의 감회도 퇴색되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 대신 주께 의뢰하고 즐겁게 살아가렵니다. 불효자는 이 밤에도 기도합니다.
10월 17일 수요일
어제처럼 새벽 4시 40분에 기상하여 하루를 시작하였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은 페이지를 본 날이다. 무척 추운 기온이었다. 하늘은 청명하고 교정의 낙엽은 발에 밟히고 내 마음은 굳을 대로 굳어져 마냥 먼 미래만 생각하고 다니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의 인생행로이니 주어진 마음의 고통도 아낌없이 감당하자는 심정이 지배하였다. 같이 응시하여 합격한 이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인생이니 그럴 테지 라는 체념도 스쳐 갔다. 이제 다시 힘을 모아 내일을 지향하고자 한다. 텅 빈 마음에 채울 것 없는 이 가을이 잔인하다. 온 들녘은 일년의 수확을 기대하고 있는데, 나는 마음 둘 곳 없이 그저 오늘도 장래를 마냥 그리며 공부해야 하는구나. 고난 앞에서 오뚜기처럼 일어서던 그 만용은 어디 가고 마음 둘 곳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부여안고 이 밤도 독한 술기운에 의탁하여 이 글을 적는다.
1991년 1차 시험을 합격하기까지는 단 하루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 뭔가 스치는 생각을 기록하는 것도 호강스러운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직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6월 20일에 있었던 1차 시험에 합격하였다. 어렵게 출제되어 커트라인도 78.75점으로 낮았고, 741명이 합격했다. 나는 커트라인에서 단 1문제를 더 맞아 간신히 합격하였다. 나름대로 선방하였던 2차 시험의 합격도 잔뜩 기대하였다. 발표가 가까워져 오던 어느 날 법대 고시실 침대에서 낮잠을 자는데, 고시실 출입문 앞에 검은 옷에 금빛 방울이 달린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를 힐끔 바라보고 출입문을 열고 고시실로 들어갔다. 옥상에 있던 나는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바로 앞에 붉은색의 활짝 핀 꽃나무가 담긴 화분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안위"라고 적혀진 연분홍 띠가 둘러져 있었다. 바로 옆에는 한 조각을 떼어낸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내 좌석으로 왔더니 책상 위에는 아주 생생한 푸른 잎이 맺혀 있는 조그만 대추나무 줄기가 놓여 있었다. 꿈이었다.
아마 그해 있던 2차 실패를 예견하면서 새 희망을 주는 전조 같았다. '안위(安慰)'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쉽게 동시 합격은 하지 못하였다. 그해 가을학기에 대학원 전공시험에 합격하여 논문 제출 자격을 취득하였다. 다시 시작한 2차 시험공부 중 예전과 달리 뭔가 좋은 징조를 예시하는 듯한 꿈을 꾸곤 하였다. 정말 열심히 2차 공부에 전념하였다. 어떤 사념에도 괘념치 않고 공부에만, 공부에만 매달렸다. 마음에 와닿는 성경 구절도 되새겼다.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언 24:10).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모의고사를 보았는데, 박윤흔 교수님께서는 행정법을 채점하신 시험지에 격려의 글을 적어 놓으셨다.
"먼저 책을 읽어서 우선 줄거리만 파악하십시오.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와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어렵지 않습니다."
1992년 6월 30일부터 4일간 한양대학교에서 2차 시험을 보게 되었다. 시험을 보는 교실에 들어갔더니 예전 9급 검찰 사무실 시험을 보고 합격하였던 바로 그 시험장 같았다. 말단 공무원 시험을 마음 졸이며 보았던 곳에서는 이제는 고시를 보게 되었다.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긴장 속에서도 한순간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교마다 버스로 수험생들을 태워다 주었기에 시험장 근처에 여러 학교 버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험을 마치고 오면 곧바로 도서관에 가서 새벽 3~4시까지 다음 날 보게 될 두 과목을 공부했다.
오전에 2시간 동안 한 과목을 보고, 오후에 또 한 과목을 보는 일정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에 에어컨, 선풍기도 없는 교실에서 매일 4시간씩 시험을 보면서 체력의 부족을 실감했다. 오전 시험을 마치면 온몸이 천근처럼 무겁고 뼈마디가 쑤시는 것처럼 힘들었다. 도시락을 먹고 수험생들이 오가는 복도에 누워있어야 했다. 시험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중에는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긴장으로 내 생애에 시험을 마치는 마지막 날이 돌아올 것인가 싶었다. 새삼 36세 나이 탓인가 싶었다. 어김없이 시험을 마친 날이 다가왔다. 다시는 고시 답안지를 메꾸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확신 가운데 시험장을 나왔다.
9월 26일 토요일 합격자 발표일에 명단을 발표하는 서울신문사로 향했다. 신문이 배포되기 전에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신문사로 간 것이다. 나처럼 여러 수험생들이 석간신문이 나오기를 신문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길로 기름 냄새가 풍기는 신문을 휙휙 넘겼다. 총무처장관 명의의 "제34회 사법시험 및 제10회 군법무관임용시험 제2차시험 합격자발표"가 눈에 들어왔다. "20036 정형근" 내 수험번호와 이름이 있었다. 커트라인 52.04점으로 288명이 합격했다.
얼마 후 이틀 동안 면접시험을 보았다. 둘째 날 집단토론 시간에 "최루탄과 화염병을 비교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면접위원들 앞에서 5분간 메모를 한 후 순서대로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경찰이 과도한 최루탄 사용으로 이한열 열사를 희생시킨 것은 문제라면서, 최루탄을 쓰더라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하는 비례의 원칙을 위반하면 안된다고 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에도 경찰권 행사는 비례의 원칙을 위반해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그랬더니 면접위원이었던 어떤 검사는 "최루탄 사용은 적법한 것이고, 화염병 던지는 것은 불법"이라면서, "경찰관직무집행법 어디에 비례의 원칙이 규정되어 있냐?"면서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경찰대 출신의 경찰관은 대학생들의 집회 진압 중 화염병 투척 때문에 겪었던 위험한 상황을 말하면서 불법 집회의 문제점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면접을 마쳤기 때문에 최종 발표날 때까지 긴장되었다. 드디어 사법시험에 최종합격을 하였다. 그리고 성탄절에 결혼식을 올렸다. 36세의 날들이 그렇게 지나갔다. 사시합격 후 남는 시간에 행정법 논문을 완성하여 그 다음 해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