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돈만 내면 감형? '형사공탁'에 피해자가 'NO'라고 말할 때
가해자가 돈만 내면 감형? '형사공탁'에 피해자가 'NO'라고 말할 때
합의금 대신 '기습 공탁'... 피해자는 속수무책 당해야만 하나?

피해자는 가해자의 '형사공탁'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가해자가 합의 대신 법원에 돈을 맡기는 '형사공탁'에 피해자가 "그 돈 안 받겠다"고 맞서는 상황, 법적으로 문제는 없을까.
형사사건 피해자 A씨는 가해자 측 변호사로부터 "합의가 안 되면 어차피 형사공탁을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해자가 법원에 일방적으로 돈을 맡기는 제도가 감형 사유로 쓰일 수 있다는 압박이었다.
분한 마음에 "공탁해봐야 소용없으니 헛돈 쓰지 말라"고 맞서고 싶지만, 혹시 법적으로 불리해질까 망설여진다. 과연 피해자가 가해자의 공탁 시도에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혀도 괜찮을까? 5명의 변호사와 법률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피해자의 권리와 대응 전략을 짚어봤다.
"문제없다"… 변호사들의 일치된 답변
A씨의 질문에 변호사들은 한목소리로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피해자가 합의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공탁금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행사라는 것이다.
조기현 변호사(법무법인대한중앙)는 "상대방 변호사에게 형사공탁 해도 소용없으니 헛돈 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박성현 변호사(법률사무소 유) 역시 "상대방 변호사에게 공탁을 해도 수령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는 것은 협상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변호사들은 감정적인 표현은 자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영림 변호사(법무법인 선승)는 "대화가 녹음되어 불리한 증거로 활용될 수 있으므로 가급적 문제 되지 않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헛돈 쓰지 말라'는 직설적 표현보다 '제시한 금액으로는 합의 의사가 없으며, 공탁 시에도 수령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차분히 의사를 전달하는 편이 안전하다.
공탁만 하면 끝? '엄벌 탄원서'라는 강력한 카드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가해자가 공탁을 강행하면 어떻게 될까. 변호사들은 공탁 사실 자체가 양형(형벌의 정도를 정하는 것)에 참작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가해자가 피해 회복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했다고 재판부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피해자가 꺼내 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가 바로 '엄벌 탄원서'다. 허유영 변호사(법무법인 세담)는 "재판부에 합의 의사가 없고 엄벌만 원한다는 점, 공탁금 수령 의사가 없으니 양형에 반영하지 말아 달라는 점을 적어 엄벌탄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양형에 반영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만히 있으면 재판부가 피해자의 뜻을 오해할 수 있으니, 서면으로 '용서할 뜻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알려야 한다는 의미다.
재산범죄 vs 성범죄, 공탁의 '무게'가 다르다
형사공탁의 효과는 범죄 종류에 따라서도 무게가 달라진다. 돈으로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잣대가 된다.
안영림 변호사는 "성범죄처럼 돈으로 피해를 온전히 배상하기 어려운 사건은 일방적인 공탁이 유효한 양형자료로 평가받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반면 "재산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수령을 거절하더라도 긍정적 양형자료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최근 재판부의 기류도 변하고 있다. 최인해 변호사(법무법인 숭인)는 "최근에는 특히 기습공탁에 대해 재판부가 좋지 않은 인상을 갖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가 공탁금 수령을 거부하면 (재산범죄라도) 피해회복에 유리한 양형사유로 고려하지 않는 재판부도 있다"고 전했다. 가해자의 일방적인 '돈 던지기'식 공탁에 법원이 제동을 거는 추세라는 분석이다.
'피해자 정보' 없이도 가능해진 공탁, '기습 공탁' 논란의 배경
사실 이러한 '기습 공탁' 논란은 최근 개정된 형사공탁법과 맞물려 있다. 과거 가해자가 형사공탁을 하려면 피해자의 이름,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2022년 12월부터 시행된 개정 형사공탁법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몰라도 사건번호만으로 법원에 공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도입된 제도지만, 현실에서는 가해자가 합의 노력 없이 선고 직전 일방적으로 돈을 맡기는 '기습 공탁'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것이다. 최인해 변호사가 언급한 '재판부의 좋지 않은 인상'은 바로 이러한 제도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해자의 현명한 대응법: '감정'은 빼고 '거부 의사'는 명확히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형사공탁은 가해자의 '반성 쇼'를 위한 만능 감형 카드가 아니다. 피해자는 공탁을 거부할 명백한 권리가 있으며, 이 의사를 가해자 측에 전달하는 것 역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가장 현명한 대응은 감정적인 언사를 피하면서도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고, 동시에 법원을 향해 '엄벌 탄원서'라는 공식적인 문서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다. 박성현 변호사는 "협상 과정에서 감정적인 표현은 피하는 것을 권장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가해자의 압박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 정당한 피해 회복과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이끌어내는 첫걸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