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역 8개월 가해자와 13시간 밀착 동행... "마을 떠난다" 양형 조건은 무용지물
징역 8개월 가해자와 13시간 밀착 동행... "마을 떠난다" 양형 조건은 무용지물
출소한 성추행범과 13시간 동행
가해자 "접근 금지 말 들어본 적 없다" vs 피해자 "가처분 몰랐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경북 청송의 한 농촌 마을에 사는 70대 여성 A씨의 악몽은 2019년 11월 시작됐다.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70대 남성 B씨가 A씨의 집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발을 만지고 끌어안는 등 성추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후 1년 동안 B씨가 억지로 찾아와 성추행한 횟수만 6번에 달했다.
참다못한 A씨의 신고로 B씨는 재판에 넘겨졌고,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한 뒤 올해 7월 만기 출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B씨는 마을을 떠나겠다고 진술해 유리한 양형을 받았으나, 출소 후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이 양형 조건은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몸이 화르르 떨리는 게..." 가해자와 함께한 '공포의 13시간' 단체여행
가해자 B씨가 출소할 때쯤, 피해자 A씨는 집에 CCTV와 안전 펜스를 설치하며 재범을 우려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지난 9월 16일, 댐 지역 주민 보상 사업으로 떠난 경주·포항 마을 단체 여행에서 발생했다. 가해자 B씨가 여행에 나타난 것이다.
A씨는 마을에서 출발해 집에 돌아오기까지 무려 13시간을 성추행 가해자와 한 버스에 타고 움직여야 했다.
피해자 A씨는 "범죄자하고 마주치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몸이 화르르 떨리는 게 뭐 어떻게 할 정신이 안 되고 죽을 맛이었어요"라고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결국 즐거워야 할 여행 이후 A씨는 트라우마로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여행을 주관한 마을 이장 역시 여행자 보험 신청을 받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두 사람을 분리하는 조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접근 금지? 들어본 적 없다" 현행법이 만들어낸 피해자 고립
가해자 B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이전까지는 마을 행사에 나간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지인이 권유해서 여행에 참석했고, 피해자와는 대화가 일절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B씨는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경찰서에서도, 교도소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며 만약 그런 말이 있었다면 여행은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현행 법적 제도의 맹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는 민사상 가처분 신청을 통해 법원에 접근 금지 명령을 직접 신청해야 한다. 이는 피해자의 인격권 및 평온한 사생활을 추구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본 사안의 경우, 가해자가 6회에 걸쳐 성추행한 점, 피해자가 재범을 우려하여 안전장치를 설치한 점 등을 고려하면 접근 금지 가처분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해야 하는 구조에 있다. 고령의 A씨는 법원에 가처분을 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고, 결국 접근 금지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는 법률 지식이 부족하거나 고령인 피해자에게 능동적인 조치를 요구함으로써 심리적,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2차 피해를 유발하는 현행 제도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농촌 성범죄의 특수성: 사법부 차원의 선제적 조치 절실하다
농촌 성범죄의 경우, 공동체 규모가 작은 특성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시 만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는 피해 반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송경인 대구 여성의전화 대표는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질 수 있는 상황에서 같이 가도 되겠나 하고 이렇게 인지할 수 있는데, (현재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며 사전적 조치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본 사안의 핵심 쟁점을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접근 금지 조치가 피해자의 신청에만 의존하는 현행 제도의 적절성 ▲농촌 지역 등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성범죄 피해자 보호 방안 ▲가해자 출소 후 피해자 보호를 위한 사전적·선제적 조치의 필요성 등으로 꼽는다.
현재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판사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직권으로 피해자보호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며,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역시 법원이 직권으로 잠정조치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참고하여, 일반 성폭력범죄의 경우에도 법원이 직권으로 또는 검사의 청구에 따라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또한 가해자 출소 시 교정기관이 피해자에게 출소 사실을 통지하고, 가해자에게는 피해자에 대한 접근 금지 의무를 명확히 고지하도록 하는 출소 과정에서의 피해자 보호 조치 강화도 요구된다.
더불어, 지방자치단체와 마을 이장 등 마을 대표자에게도 공동체 행사 등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접촉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취할 피해자 보호 의무를 명확히 부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KBS 보도 이후 청송경찰서는 피해자를 상대로 보호 조치에 나섰으며, 피해자 가족들은 마을 이장 관리 권한이 있는 청송군을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성범죄 발생 환경의 특수성을 고려한 세심한 피해자 보호 정책이 마련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