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가 알아낼 수 없는 증거를 증거로 내라⋯한솔케미칼 논란으로 본 산재 소송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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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가 알아낼 수 없는 증거를 증거로 내라⋯한솔케미칼 논란으로 본 산재 소송의 역설

2020. 01. 31 15:14 작성
박선우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sw.park@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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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으로 사망한 화학 공장 근로자, 4년 만에 산재 인정

산재 행정 소송 중 '영업 비밀'이라며 자료 제출 거부한 한솔케미칼

재판부가 요구한 자료 제출 거부해도⋯회사엔 '페널티' 없어

백혈병으로 사망한 화학 공장 근로자가 4년 만에 산재로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회사 측이 재판부가 요구한 자료를 영업비밀을 이유로 거부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이미지는 사건과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코리아

"망인(亡人·죽은 사람)은 백혈병에 걸릴 수 있는 근로 환경에서 근무했다. 일을 하다 사망한 산업재해다."


화학물질을 다루는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의 사망이 산업재해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박성규 부장판사)는 지난 10일 "사망한 이모씨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판결이 나올 때까지 4년이 걸렸다. 늦어진 이유는 산재를 인정받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가족 측은 사망한 이씨가 어떤 화학물질에 노출된 채 근무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이씨의 직장이었던 한솔케미칼에 자료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자료가 공개되면 회사의 안전의무 소홀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판부까지 나서서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지만, 이마저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재판부는 "(자료 미제출은) 고인에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유가족 측 손을 들어줬다.


'산재 소송'의 특성은 근로자가 산재를 입증해야 한다는 점이다. 관련 정보를 확보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문제는 이씨의 경우처럼 사측이 주요 정보를 쥐고 있을 때다. 그리고 보통 이 정보는 사측에 불리하다.


이 경우 근로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해봤다.


"자료 제출해라" 법원의 요구, 안 따라도 상관없는 재판 구조

산재 여부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최초로 판단한다. 근로자가 산재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된다.


만약 공단에서 산재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고용노동부에 재심사를 요청할 수 있다. 여기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근로자는 행정법원에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산업재해 인정 절차. 최초의 판단은 근로복지공단에서 한다. /박선우 기자


이 모든 단계에서 회사 측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산재보험의 구조 때문이다. 일하다가 벌어진 재해의 보상 책임은 사업주가 지지만,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에 보험료를 내면 '재해보상의 책임'은 공단이 대신 짊어진다. 이 때문에 근로자의 '산재 인정 투쟁' 과정에서 사측은 뒤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행정소송에 돌입해서도 마찬가지다. 행정소송은 근로복지공단이 승인을 거절한 '처분'에 대해서 다투는데, 이 '처분'도 회사가 결정한 게 아니므로, 회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소송 당사자도 아니다. 쉽게 말해 유족과 근로복지공단이 싸우는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소송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회사가 갖고 있는 자료를 법원에 제출할 의무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법무법인(유)로고스의 박래형 변호사는 "(한솔케미칼이) 소송 당사자일 경우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재판부 심증에 불리한 영향을 줘서 그에 따라 협조한다"며 "이 사안의 경우 한솔케미칼은 소송을 진행하는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에 따르지 않아도 불이익이 발생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한솔케미칼은 자료 제출을 거부하면서 '영업상의 비밀'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서도 박 변호사는 "소송 당사자가 아닌 경우 영업비밀이란 이유로 거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산재 입증해야 하는데⋯정보 수집부터 어려움 겪는 근로자

결국 산업재해를 입증해야 할 근로자는 '정보획득'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정보를 주지 않으려는 사측에 대해 근로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박래형 변호사는 2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법무법인(유)로고스의 박래형 변호사. /로톡DB
법무법인(유)로고스의 박래형 변호사. /로톡DB


①직장 동료들을 통해 자료 수집

근로자와 같은 공간에서 일했던 동료들의 증언을 수집해야 한다.


박 변호사는 "직장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근로 환경의) 유해한 정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라"고 했다. 같은 환경에서 일한 근로자들의 증언이 근로 환경의 안전성과 유해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②소송 전에 사측의 도움 얻어내기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소송에 들어가기 전에 사측의 협조를 받아두는 것도 방법이다. 본격적으로 소송전에 돌입하면 협조를 받는 일이 더욱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서를 작성할 때부터 사측의 협조를 받는 것이 나중에 소송에 들어간 이후에 받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고 말했다. 사측이 도와주려고 해도 공단 측이 승인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근로자 측의 입증 완화 절차 필요

동시에 변호사들은 근로자에게 입증 책임이 있는 산재 인정 절차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법무법인 문장의 임원택 변호사는 "입증책임을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산재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근로자에게 과중하게 지워진 책임을 사측도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도 "근로자 측에 유리하게 완화하기 위한 절차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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