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26)]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인 변호사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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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26)]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인 변호사업계

2020. 12. 17 14:17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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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 수료 후 변호사들은 만날 때마다 "지금 변호사 업계가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셔터스톡

검찰청에서 4개월 실습을 마친 후 바로 곁에 있는 서울북부지원으로 판사 시보를 나갔다. 검찰 실습 때 지도검사실 방에서 지냈던 것과 달리, 법원은 '시보실'이라는 방에서 연수 중인 모든 시보들이 모여 지냈다. 그리고 판사님이 건네준 기록을 보고 판결문을 작성해 보거나, 국선 변호 사건을 맡아서 변호인이 되어 형사재판의 변론을 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피고인의 접견을 하러 구치소에 자주 가게 되었고, 법정의 분위기도 익숙해졌다. 장차 변호사 개업을 하려던 나는 판사님에게 말씀드려 가압류·가처분 사건의 기록도 검토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무렵 함께 연수를 받던 동기가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했다. 그래서 같은 법원에서 실습하던 동기들이 축하를 하려고 그 집에 갔다. 아파트 입구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구입하여 선물로 가져갔다. 그 선물을 받은 동기는 "비데를 쓰니까 휴지가 필요 없는데, 왜 사 왔어!"라고 했다. 그 동네는 매우 일찍부터 비데를 사용 중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비데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1994년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이었는데, 그 아파트는 에어컨 덕분에 매우 시원했다. 검사로 임관되었던 그 동기는 최근 검사장으로 퇴직하면서, 인사조치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글을 적어 이목을 끌었다.


그 후 변호사 실무수습은 서울역 앞에 있는 과거 대우빌딩 안에 사무실을 둔 로펌으로 배정되었다. 맨날 서울역 앞에서 힐끔 쳐다보았던 건물을 처음으로 들어가 로펌을 찾아갔다. "실습하려고 온 사법연수생 정형근입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점심부터 하자고 건물 안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융숭하게 점심을 대접한 대표변호사님은 나에게 "날마다 출근을 할랍니까, 집에서 공부할랍니까?"물었다. 그래서 집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대부분 시보들이 출근하지 않고 공부하겠다고 한다고 했다. 아마 그 이전에도 대부분의 시보들은 변호사 실습 기간에 다가오는 시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로펌으로 출근하는 대신 학교 선배 변호사님이 운영하는 법률사무소로 나갔다. 그리고 소장 등 각종 서면을 작성하고, 의뢰인들과 직접 상담도 하기도 하면서 변호사 실무를 그곳에서 익히게 되었다.


그렇게 검찰, 법원, 변호사 실무를 전부 마친 후에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갔다.


내가 검사장의 폭탄주를 받아 마신 소문이 쫙 퍼져있었다. 저녁 모임에서 동기들은 "검사장이 주는 잔을 받으면서,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주는 잔은 거부합니까?"라면서 술을 권하였다. 짓궂은 여성 동기는 조원들 10여명에게 생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각자 머리 위에 올리게 하고서 "정형근 조장님이 우리 잔을 받지 않으면, 이 술을 각자 머리에 쏟아 버리자"라고 부추겼다. 마시지 않겠다고 하면 분명 술을 자기들 머리에 부어버릴 태세였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를 이길 수 없어 잔을 비워야 했다. 사법연수원에서부터 음주문화가 저렇게 되어 있으니, 고위직 법조인이 된 후에는 아무에게나 잔을 비우라고 강요하는 풍토가 생긴 것 같았다.


연수원 2년 때 새로 오신 부장판사이신 교수님과도 저녁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늦어져 자정이 되자 자택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연수원 1년 차 때도 모임 중 심야가 되면, 지도교수님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치 관행처럼 지도교수님들은 연수생들을 한 번쯤은 집으로 데리고 가는 분위기 같았다.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가기 때문에 대개는 초인종 소리에 잠옷 차림으로 출입문을 열어주려고 나온 사모님은 10여명의 연수생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서 황급히 다시 안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늦은 시간에 거실에서 녹차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교수님은 법원에 있다 보면 "저런 자가 판사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질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인간 사회는 어디나 비슷하구나 생각되었다. 그분은 후일 대법관으로 큰 활동을 하였다.

1995년 39세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 500만원 가입비를 납부하고 변호사등록을 하고, 4517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변호사 배지를 받았다. 4517은 해방 이후 등록한 변호사의 숫자였다. 시보 시절 함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자는 선배 변호사를 찾아뵈었더니, 그분은 공증인 사무소로 들어가기로 했다고 하여 없던 일이 되었다. 그 무렵 사법연수원 수료할 때 30대 후반 나이 정도면 단독으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젊은 동기들은 주로 로펌 등에 500만원 가량을 받고 취업을 했다. 수원에서 개업 중인 변호사는 월 700만원을 주겠다고 고용변호사를 채용하려고 하였지만, 지방이라고 지망하는 자가 없어 채용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배 변호사들은 만날 때마다 "지금 변호사 업계가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사법시험을 해마다 300명씩 합격시켜 판·검사로 150명 가량 임용되고, 나머지 150명 정도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마다 많은 변호사가 쏟아져 나와 수임 환경이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세상살이의 고달픔에서 벗어나 만족하며 지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싶었다.


어디서 개업을 하나 생각하며 지낼 때 10년 전부터 개업하고 있었던 박영립 변호사님(훗날 화우 대표변호사)이 사무실에 공간이 있으니, 그곳에서 개업하라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그 덕분에 서초동 교대역 부근에 법률사무소를 개설하고 변호사로 첫 출발을 하였다. 변호사는 매달 10일이 될 때까지 그달 고정비가 들어오지 않으면, 그때부터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엄숙함이 밀려왔다.


신문에 실렸던 정형근 교수의 당시 개업 인사. /정형근 교수 제공



그 무렵 박 변호사님이 수임하여 진행 중이던 '학위수여 이행의 소' 사건이 헌법적 쟁점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내가 준비서면을 작성해 보기로 하였다. 기독교 법인이 설립한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필수과목이었던 채플 수업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수강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졸업학점 중 필수과목 미수강을 이유로 그 학생에 대하여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채플 과목은 1주일에 1시간 배정되고, 출석만 하면 되는 수업이었다. 그런데 원고는 군 복무 후 복학한 후에 그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 전공필수 과목의 학점 미달로 학사학위 수여가 거부된 사건이었다.


그러자 원고는 학교법인을 상대로 "피고는 원고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하라"는 학위수여 이행의 소를 제기했다. 그 사건을 박 변호사님이 피고(학교법인) 측을 대리하였다. 그리고 학사 학위를 받지 못하여 소를 제기한 대학생의 소송대리인은 오세훈 변호사(훗날 서울특별시장)였다. 오 변호사는 1994년 MBC TV에서 "오변호사, 배변호사"라는 프로그램으로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던 분이었다. 미션스쿨에 입학한 대학생이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채플 과목 학점을 취득하지 않았다고 하여 졸업장을 받지 못한 사건은 헌법의 기본권과 관련하여 쟁점이 매우 많아 쓸 내용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그 사건기록을 보았을 때는, 오 변호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준비서면은 두세 장밖에 되지 않았다. 사건의 비중에 비추어 볼 때, 핵심적으로 적었는지 매우 간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나중에 몇 번이고 새로운 서면을 제출할 수 있다.


내가 그 사건의 피고(학교법인) 입장을 대리하는 내용의 준비서면을 작성하였다. 매우 상세하게 채플 수업을 듣지 않은 학생에게 학위를 수여 하지 않은 학교의 조치는 적법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입증자료를 준비했다. 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생길까 봐 입학할 때, 신입생과 그 학부모에게 기독교 대학이라서 의무적으로 채플 수업을 수강할 것을 고지받았다는 확인서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채플 시간이라고 해서 예배 등의 종교행사를 하는 시간으로 알았는데, 문익환씨와 같은 사회저명 인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등 교양과목으로 운영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미션스쿨이라 하더라도 종교를 달리하는 학생들도 입학하게 되고, 순수한 종교행사 시간으로 진행하면 그들의 거부감도 있을 것이라서 저렇게 탄력적으로 운영한 것 같았다. 내가 작성한 서면을 본 박 변호사님은 매우 만족해하시고, 채플 시간에 진행하였던 수업의 내용에 관한 자료를 추가하여 법원에 제출하였다. 얼마 후에 있었던 판결 선고에서 원고는 패소했다.


"종교단체가 설립한 사립대학에서 일정 학기 동안 대학예배에 참석할 것을 졸업요건으로 하는 학칙을 정한 경우, 학생들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학생들의 신앙을 가지지 아니할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서울지방법원 1995. 7. 6 선고 95가합30135 판결)는 취지의 판결이 선고되었다. 재판장은 훗날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황식이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내가 수임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다소간의 보람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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