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그의 것은 맞다" 판단에도, 무죄 된 '버스 정액男 사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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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그의 것은 맞다" 판단에도, 무죄 된 '버스 정액男 사건'⋯ 왜?

2019. 10. 16 15:34 작성
안세연 인턴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sy.ahn@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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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여성 뒷머리에 정액 뿌린 혐의로 기소된 남성, 2심에서 '무죄'

"정액은 기소된 남성의 것" 재판부도 인정했지만⋯ 무죄 판단한 이유는?

해당 사건 담당한 류인규 변호사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내려진 무죄 판결"

시내버스에서 여성 뒷머리에 정액을 뿌린 혐의로 기소된 남성이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당 사진은 사건과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15일 시내버스에서 여성 뒷머리에 정액을 뿌린 혐의로 기소된 남성이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알려지며 공분을 샀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1심을 뒤집은 판결이었다. 언론도 이를 '반전 무죄'라며 크게 다뤘다.


보도를 접한 이들 대부분은 "정액이 본인 것이 맞다는데 왜 무죄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액이 해당 남성의 것이라는 감정 결과가 나왔음에도, 재판부는 추행 사실이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지의 취재 결과, 이는 언론 등에서 판결문의 단편적인 부분만 인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부가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린 배경에는 '초동수사의 미흡으로 인한 증거부족'이 컸다.


해당 사건을 수행한 법무법인 시월 류인규 변호사는 "심증만으로 유죄를 인정해선 안 된다는 형사법 대원칙에 부합하는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시내버스에 앞자리 앉은 여성 머리에 정액 묻힌 만취男

사건은 지난해 5월 14일 오후 10시쯤 서울에서 출발한 한 버스 안에서 일어났다. 경기도로 가는 버스에 탄 A(39)씨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술에 취한 채였다. 그 앞자리에는 B(31)씨가 앉아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B씨는 통화 도중 시간차를 두고 머리를 건드리는 기척을 2번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버스에 내릴무렵 머리를 만져보니 뒷머리가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에선 안 좋은 냄새가 났다. 정액 같다고 느꼈다.


B씨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A씨는 현장에서 조사를 받았다. "비염으로 재채기를 했지만 정액을 묻힌 사실은 없다"고 부인했다. 검찰은 A씨를 성폭력범죄특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1심에선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명령 40시간, 사회봉사 160시간이 선고됐다.


이 사건을 수원지법 형사항소8부(재판장 송승우 부장판사)가 지난 15일 무죄로 뒤집은 것이다.


1심의 징역형 판결을 뒤집은 배경 '무죄추정의 원칙'

우리 헌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고, 형사소송법도 이를 대원칙으로 규정함으로써 형사재판 전반을 이끌도록 하고 있다.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e reo)'라는 라틴어 격언을 형사법의 근간으로 삼은 것이다.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는 취지다.


징역형이었던 1심을 뒤집고 무죄가 선고된 배경에도 이 원칙이 있었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범죄가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압축된다.


우리 헌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고, 형사소송법도 이를 대원칙으로 규정함으로써 형사재판 전반을 이끌도록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재판부가 무죄를 내린 결정적 원인 3가지

① 미흡한 경찰의 초동수사

재판부는 먼저 경찰의 최초수사가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사건 발생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은 버스에 다른 승객들이 있었지만 승객들의 신원 및 목격자가 있었는지 여부를 조사하지 못했다. 피해 당사자가 "범행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한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해진 목격자 진술이 없었다.


또한 수사기관은 A씨의 구강상피세포만을 채취하여 감정을 의뢰했다. 피해자인 B씨가 "버스에서 어떤 남자가 머리에 정액을 묻혔다"고 했지만 경찰은 A씨 손이나 다른 신체에 정액이 묻어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이에 재판부는 "A씨가 자위행위를 했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판단했다.


② 버스 안 CC(폐쇄회로)TV 증거

경찰이 제출한 CCTV에 A씨는 버스 내 좌석에 앉아서 졸고 있는 듯한 모습 외에 다른 행동을 하는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버스 내 좌석의 위치와 승객 등 주변 상황에 비추어 보더라도, A씨가 몰래 자위하기 쉬운 상황이라 볼 수 없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③ 기소된 남성의 일관된 진술

재판부는 무죄 판결 첫번째 이유로 '피고인의 일관된 진술'을 꼽았다. A씨는 사건 발생 직후 수사기관에서 "당일 술에 취해 버스에서 중간에 잠이 들었다"며 "비염으로 재채기를 했을지언정 정액을 묻힌 사실은 없다"고 진술했다. 또한 며칠 뒤 피의자신문 과정에서도 "정액을 뿌린 적이 없다"며 "집에 가서 옷이랑 전부 뒤져봤는데도 그런 흔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해당 사건 변호사, '정액 검사' 분석한 의학 논문까지 근거로 삼아 변론

이번 사건을 담당한 법무법인 시월의 류인규 변호사. / 로톡DB
이번 사건을 담당한 법무법인 시월의 류인규 변호사. / 로톡DB

변호인은 이런 사실을 토대로 "다른 경로로 정액이 묻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변론했다. 그러면서 성범죄 사건 17건의 정액 검사를 분석한 의학 논문을 제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현장 증거물을 통한 정액 검사는 다양한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며, 일부 검사법끼리는 결과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부실하게 수사된 경찰수사 결과가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명백히 입증하지 못한다는 걸 파고든 변론이었다.


결국 재판부는 이런 주장들을 받아들여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A씨의 혐의를 증명할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을 수행한 류인규 변호사는 "유죄의 의심이 들더라도 부실한 초동수사를 바탕으로 섣불리 유죄 판결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인해준 판결"이라며 "심증이 아닌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무죄 판결을 내려준 재판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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