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14)] 필승의 신념을 사생의 맹서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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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14)] 필승의 신념을 사생의 맹서로 삼아

2020. 04. 08 17:06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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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합격하자는 마음의 각오를 굳세게 할 문구를 만들기로 했다. 절대적으로 합격하자는 의지가 표현된 글을 며칠간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완성했다. /정형근 교수

서울의 겨울 추위는 매서웠다. 독서실에는 임박한 대학 본고사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과 재수생들로 가득했다. 내 좌석 옆에는 서울고 3학년 학생이 "立志 서울法大"(입지 서울법대)라고 기재한 메모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잠을 자고 있는데 주변이 몹시 소란했다. 머리가 몽롱하고 자꾸만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때 대입 삼수생 형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야! 괜찮냐?"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씩'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잠을 자려는데 주위가 시끄러워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독서실 옆에 있던 합기도장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서너 군데에 이불을 많이 쌓아 두었고, 이불 밑에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대입 본고사 준비생들이었다. 합기도장이라서 바닥이 푹신푹신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머리가 아프고 몸에 힘이 빠진다는 느낌이 왔다. 바로 곁에 있던 등받이가 없는 둥그런 의자에 앉으려고 엉덩이를 대는 순간 벌렁 뒤로 넘어져 버렸다. 그리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나도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뒤로 넘어진 나를 본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와 차가운 바닥에 이불을 펴고 나를 그 위에 눕혀 주었다. 한참 후 일어나 보니 얼마 전까지 웅성거렸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합기도장을 나와 출입구 쪽으로 나오니,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시간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상태에서 밖을 응시하며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연탄가스는 잠든 사람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 일을 겪고 그 독서실에서 계속 지내기 두려워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침식이 가능한 독서실을 찾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서울법대 재학 중에 데모를 하다가 제적이 되었다는 분을 만났다. 그분은 과외를 하면서 독서실에 나와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분은 유기천 교수의 형법 교과서도 빌려주면서 법대생들이 많이 보는 책도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친해진 후에 내 사정을 알고서는 나에게 고시 공부를 그만두라고 했다. 그리고 형편도 어렵고 하니까 일단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듣고 보니 옳은 것 같아 즉시 고시 공부를 멈췄다. 그리고 검찰 서기보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9급을 합격하고, 이어 근무하면서 7급도 합격하고 사법고시에 도전하기로 했다. 목표를 낮추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돈이 없어 매식을 할 수 없어 독서실에서 버너로 밥을 지어 먹어야 했다. 버너로 불 조절을 잘하여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능숙해졌다. 쌀값도 없을 때는 어린이들의 분유를 우유처럼 마시며 끼니를 때웠다. 가끔 시골에서 어머니가 미숫가루를 부쳐오기도 하였다. 지독하게 추운 첫 겨울을 그렇게 지내야 했다. 기온이 내려가니 난로 곁에 손을 대고 있어도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달에 몇천원 하는 독서실비를 내지 못하게 되자, 주인은 그 대가로 청소를 해달라고했다. 결국 날마다 청소를 해주며 카운터에까지 앉아 있는 독서실 총무가 되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날마다 독서실에서 침식을 해결하며 지내다 보니 불편한 것이 많았다. 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편하게 누워 잘 수 있는 시골집이 자꾸만 그리워졌다. 청운의 꿈을 이루고자 큰마음 먹고 올라온 서울에서 그렇게 지내면 안 될 거 같았다. 약해진 마음을 강하게 바로잡아야 했다. 어둠이 깊어지는 초저녁에 옥상으로 올랐다. 무릎을 꿇고 하얀 종이 한 장을 바닥에 놓았다. 합격의 각오를 굳게 하자는 의미로 혈서를 쓰기로 했다. 어금니로 새끼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힘껏 물어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단 한 번에 피를 내며 글을 쓰던데, 실제로 해보니 잘되지 않았다. 아무리 손가락을 물어뜯어도 피가 나오지 않아 급히 옥상에서 내려왔다. 근처에 있던 문방구에서 면도칼을 샀다. 다시 무릎을 꿇고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을 쓱쓱 벴다. 그제야 피가 보였다. "必勝"(필승) 이렇게 썼다. 혈서를 쓴 종이를 책상에 붙여놓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지독한 ○○○놈!"이라고 수근 거렸다.


1976년 9월에 9급 검찰사무직 시험을 20세에 처음으로 응시했다. 장소는 경희여자고등학교였다. 예비소집 날 많은 수험생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시험 당일에 비록 시험 장소였지만, 고등학교 교실을 처음으로 들어가 보았다. 고교 교문도 못 가봤던 나로서는 그것도 신기했다. 영어가 매우 어려웠다. 시험 종료종이 울리고 밖으로 나올 때, 나도 모르게 "될 때까지 해야지!"라는 다짐이 나왔다. 시험장을 빠져나오면서 단풍이 들어가는 캠퍼스의 아름다운 모습과 내 또래의 활기찬 대학생들을 보니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보였다. 세찬 바람이 불고 하늘이 어두운 구름으로 가득 찬 날 합격자 발표를 했다. 검은 먹구름이 초조하고 두려운 내 마음을 비추는 듯했다.


영등포 어디선가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던 영화관에서 초조함을 달래다가 공무원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고 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병든 닭처럼 고개를 처박고 터벅터벅 걸었다. 책상 앞에 필승(必勝)이라고 쓴 혈서가 부끄러웠다. 그 종이를 떼어냈다. 급히 가방을 챙겨 독서실을 나와 동대문에서 광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향인 강진에 도착하였을 때는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인데, 집에 가는 버스도 끊어진 상태였다. 읍내에서 집까지는 12km가량 떨어진 거리였다. 그 밤중에 삼 십리 길을 걸어서라도 가야 하나, 여관에서 자고 다음 날 가야 하나 순간 망설여졌다. 시험도 합격하지 못한 주제에 호강스럽게 무슨 여관이냐 싶어 걸어서 가기로 했다. 예전에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포장도로에 가득한 자갈들이 발길에 차였다.


한참을 걸었더니 어느 마을 입구의 조그만 가게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 앞을 지나갈 때 청년 서너 명이 나에게 다가와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그곳에서 인접한 칠량면에 있는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 밤중에 어떻게 걸어서 가느냐며, 자기 사랑방에서 자고 아침에 가라고 권했다.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고 그대로 걸어갔다.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시험에 떨어져 심란한 마음으로 심야에 고향 집을 가는데, 거기에 비까지 내리니 울적한 감정이 솟구쳤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걷는데, 저 뒤편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이 어둠으로 가득한 들판에 오토바이 불빛이 땅과 하늘을 비춰대면서 다가왔다. 조금 전에 지나쳤던 마을 가게 앞에서 만났던 청년 2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온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미안하지만 주민등록증 좀 봅시다."라고 했다. 내 주민증을 확인한 그들은 "이 밤중에 혼자 길을 가는 것이 수상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수상한 사람으로 알았다면 경찰에 알려야지 맨손으로 달려온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그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되돌아갔다.


계속 내린 비에 옷도 완전히 젖었다. 걸음을 옮길 적마다 "내년에는 반드시 붙고야 만다."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하늘이시여! 저를 굽어살피소서! 저의 꿈을 이루게 도와주소서! 내년에는 반드시 합격하게 해주소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공동묘지가 있는 산길을 지날 때는 귀신이 나올까 무서움이 밀려왔다. 시험도 떨어진 놈이라 귀신에 홀려가도 할 말이 없다고 자책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주먹만 한 돌덩이를 양손에 집어 들고 있었다. 금의환향을 바랐는데, 그 밤중에 두세 시간을 걸어서 물에 빠진 생쥐처럼 비에 젖어 집에 도착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쫄딱 젖은 모습으로 서울에 있던 내가 갑자기 나타나니, 어머니는 마치 한밤중에 도깨비를 만난 듯 놀랐다. 나는 합격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간 필승이라고 적힌 혈서 종이를 꺼내어 찢었다. 이렇게 혈서까지 쓰면서 노력했는데, 그 보람도 없이 떨어졌다고 했다. 얼마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뭐라도 붙어야 했기에 7급 행정직도 같이 준비했다. 시험과목 중 행정학이 어려워 학원을 나갔다. 행정학은 행정법과 이름은 비슷한데 내용이 전혀 달랐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7급 준비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붙을 가능성이 없어도 꿈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여름 무렵에 경희대에서 시험을 보았다.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려 어두컴컴했다. 시험 보는 교실에 전기시설이 없어 어두워서 시험지를 읽기도 어려웠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데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후련함이 있어야 할 건데 왠지 허전하고 허탈했다. 기분을 달래려고 종로 어느 극장에서 '미드웨이' 해전 영화를 봤다. 7급 행정직은 안될 거 같아서 가을에 있는 검찰직만큼은 합격하자고 다짐했다.


/정형근 교수 제공

이제는 혈서를 쓰지 말고 반드시 합격하자는 마음의 각오를 굳세게 할 문구를 만들기로 했다. 절대적으로 합격하자는 의지가 표현된 글을 며칠간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완성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조그만 메모지에 적어 놓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오늘의 이 一步가

내일의 百步가 될지니

내 이제 心機一轉

必勝의 信念을

死生의 盟誓로 삼아

寸陰을 아끼리라.

1977年 靑年 鄭亨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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