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 기억, 삶과 죽음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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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기억, 삶과 죽음의 경계

2022. 05. 20 14:41 작성2022. 05. 20 16: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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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de movie]

원더풀 라이프 (ワンダフルライフ), 1998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죽은 사람들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기 전에 기억을 선택하는 곳에서 일하는 시오리(오다 에리카 연기)는 백과사전을 읽는다. 젊어서 죽은 시오리는 이승에 미련이 있고 그래서 더욱 알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 TV Man Union

한국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규제한다. 자살방조죄가 있어 다른 이의 자살을 눈감은 사람을 처벌한다. 자살한 당사자는 세상에 없어 기소하지 않을 뿐이다.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사람에게 보험급여를 해주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기 생명을 저버릴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 셈이다. 자살을 헌법의 언어로 말해보면, 개인의 운명결정권이 국가의 생명보호의무라는 한계선을 넘는 일이다. 국가의 생명보호의무는 개인의 헌법상 기본권인 생명권에서 나온다. 현행 헌법에는 생명권이 없지만 헌법재판소가 행복추구권 등에서 도출했다. 세월호 사고가 있던 2014년 생명권을 헌법에 명시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 개헌안은 제12조에서 '모든 사람은 생명권을 가지며, 신체와 정신을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고 정했다.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국가가 무한정 인정할 수는 없는데 생명과 관련되면 복잡해진다. 존엄사와 낙태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헌법에 막연히 생명권을 넣는 수준을 넘어 구체적인 사안에 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2009년 국회의장 자문기구 헌법연구 자문위원회 보고서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같은 해 발효된 EU 기본권 헌장은 제3조 2항에서 우생학적 처지 금지, 인간복제 금지 등을 밝혀두었다. 전통적인 생명권 사상은 존엄사도 낙태도 금지한다. "나는 그 누가 요구해도 극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복중 태아를 가진 임신부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기원전 5세기 무렵 만들어진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한 구절이다. 현대의 낙태와 존엄사 논쟁은 생명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생명권은 언제 시작돼 언제 없어지는지를 다투어왔다. 결국 현대의 삶과 죽음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이고, 어쩌면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모치즈키(ARATA 연기·오른쪽)는 와타나베(나이토 타케토시 연기)가 기억을 고르도록 삶이 요약된 비디오를 보여준다. 그런데 모니터에 나오는 와타나베의 부인은 모치즈키의 약혼녀다. 모치즈키가 스물셋에 전사하자 와타나베를 만나 결혼한 것이었다. / TV Man Union


2009년 대법원의 김 할머니 사건 판결은 존엄사에 관한 치열한 헌법논쟁의 결과다. 이는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의 후속 판결과도 같다. 1997년 서울 보라매병원 의사들은 보호자 없는 응급환자를 수술했다. 다음날 환자의 가족이 치료비를 부담하기 어렵다며 퇴원을 요구했다. 의사들은 보호자의 요구를 거부하다가 결국 '환자의 죽음에 대해 병원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퇴원시켰고, 환자는 곧 사망했다. 대법원은 보호자에게 살인죄 유죄, 의사에게 살인방조죄 유죄를 선고했다. 보라매 판결 이후 의사들은 불가피하게 환자를 내보내더라도 산소통을 보호자 집에 설치해 주고 왔다. 산소를 추가로 공급하지 않아 환자가 죽어도 보호자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무렵 김 할머니 사건이 생겼다. 2008년 76세이던 김 할머니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폐암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 출혈로 식물인간이 됐다. 가족들은 중환자실의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세브란스병원은 거부했다. 그러자 김 할머니의 가족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장치 제거를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연명장치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개념을 만들었다. 김 할머니는 '회복이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라는 것, 김 할머니 본인의 '연명치료 중단 의사가 추정된다'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선에서 면으로 확장하고 이곳에 김 할머니를 놓은 다음, 다시 김 할머니를 생생한 삶으로 끌어와 어떤 선택을 할지 물은 것이다. 이 판결로 뇌사에 빠지기 전에 존엄사 의사를 밝히면 연명치료 장치 제거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존엄사가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반대의견은 회복불가능한 단계라는 것에 동의할 수도 없고, 추정적 의사라는 말도 결국 가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존엄사 판단 기준으로 '죽음의 경계'와 '본인의 의사'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해보자고 했다. 자기결정권만이 아닌 종합적인 관점에서 보자고 했다.


"그 가족을 포함한 환자 측 및 의료기관의 제반 사정을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정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는 환자의 나이·직업이나 경력, 평소의 종교·신념이나 생활태도, 질환의 경과와 현재 상태, 생명 연장이 가능한 기간의 장단, 이미 지출한 또는 앞으로 지출하게 될 비용, 가족들의 상황, 환자로 인한 가족들의 정신적 고통, 그들의 경제적 지출을 포함한 생활상의 희생 등 (중략) 이 문제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의료인들이 많다. 가령 이런 얘기들이다. "죽음의 기준이 심폐정지에서 뇌사로 바뀌었지만 앞으로 또 모른다. 근본적으로 삶과 죽음은 온(On)과 오프(Off)가 아니라 무수히 변하는 프로세스." "뇌사를 판정받은 청소년이 장기기증 직전에 깨어난 일이 이미 2012년에 덴마크에서 있었다. 과학이 가치판단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임의기준인 과학을 근거로 절대기준을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


낙태규제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위헌으로 선언한 것이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결정이다. 해리 블랙먼 대법관이 작성한 결정문은 미국 헌법학 교과서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고전이다. 그가 이 결정을 주도한 배경에는 의료지식이 있다. 블랙먼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면서 병원업무를 익혔다. 블랙먼에게는 낙태와 관련한 개인사가 있다. 둘째 딸이 19살이던 대학교 2학년 시절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했다. 의료계에 발이 넓은 블랙먼으로서는 안전하게 낙태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먼 가족은 낙태를 선택지로 고려하지 않았다. 블랙먼의 딸은 대학을 그만두고 20살에 결혼했는데, 결혼식을 올리고 3주 만에 유산했다. 결혼생활도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이혼했다.

'로 대 웨이드' 결정으로 미국에서 낙태가 모두 합법화된 것도, 이후 그 범위가 확대된 것만도 아니다. 여러 주에서 낙태에 관련된 법률들을 만들었고 연방대법원 결정도 엎치락뒤치락했다. 가령 "임부의 생명을 구하려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데도 낙태를 권유하거나 상담해주려는 목적으로 공공기금을 사용할 수 없다"는 미주리주 법률이 만들어졌는데 1976년 위헌 결정을 받았다. "18세 미만 여성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경우가 아닌 낙태인 경우 부모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미주리주 법률에는 1989년 합헌을 결정했다. 낙태허용 시기를 임신 28주에서 23주로 당긴 1992년 '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of Southern eastern Pennsylvania v. Casey)' 결정도 있다. 의료기술 발달에 따라 태아의 독자생존 가능 시점이 빨라져서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2019년 낙태를 금지하는 형법 조항을 위헌으로 결정했다. 다만 이 조항을 없애기는 곤란하니 이듬해 말까지 국회가 법을 손보라고 했다. 헌법불합치다. 하지만 국회는 시한까지 개정하지 못했고 조항은 사라졌다. 이 사건 법정의견인 헌법불합치 의견에서 핵심은 이 문장이다. "국가는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사회적·제도적 개선을 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은 충분히 하지 못하면서 형법적 제재 및 이에 따른 형벌의 위하로써 임신한 여성에 대하여 전면적·일률적으로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취지의 문장이 합헌의견에도 나온다. "현실에서 임신한 여성은 모성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사회 환경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임신을 부정하고 태아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불합치 의견과 합헌의견은 근본적으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다. 태아는 당연히 태어나야 하는데 사회가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생각이 갈리는 대목은 이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불합치 의견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처벌이 어렵다는 것이고, 합헌의견은 낙태를 허용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낙태금지 조항을 곧바로 폐지하자는 단순위헌 의견은 아예 다른 입장에서 접근한다. 태아에게 헌법적 권리로서 생명권이 있는지를 의심한다. "태아는 모체에서 점점 성장하여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 후 출생을 통하여 인간이 되므로 (중략) 태아가 과연 기본권 주체로서의 '인간'에 해당하는가에 관하여는 세계적으로 많은 논의가 있고 (중략) 태아가 생명권에 대한 기본권 주체가 되는가에 관계없이 (중략)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중대한 공익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는 해리 블랙먼 대법관의 아이디어와 비슷하다. 사후 공개된 그의 메모에는 "태아에게 생명이 있다면 정부가 모든 낙태를 불법화할 수 있다"고 했다.


모치즈키는 와타나베가 저승으로 떠나고 자신의 약혼녀이자 와타나베의 부인이던 교코가 고른 기억을 찾아본다. 마지막으로 가져갈 기억을 선택하지 못해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머무르는 모치즈키는 교코의 기억을 확인하고, 자신이 영원히 기억할 순간을 선택한다. / TV Man Union


<원더풀 라이프>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기 전에 머무르는 곳 이야기다. 이승에서 죽은 사람들이 1주일 동안 머물면서 자기 삶을 돌아보고 가장 행복한 기억을 하나 고른다. 이 기억 하나만 가지고 다음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다른 기억은 모두 사라진다. 디즈니랜드에서 놀던 기억을 가져가고 싶다는 여학생, 아이를 낳던 경험을 얘기하는 여성이 나온다. 살면서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며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남성, 알츠하이머에 걸려 창밖만 보는 할머니도 있다. 섹스할 때가 가장 좋았는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할아버지는 신이 나 있다. 이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여중생들은 어김없이 디즈니랜드를 고른다고 알려주거나, 죽은이의 삶이 담긴 비디오를 보여주며 좋은 기억을 찾아내게 해준다. 그런데 정작 직원들은 좋은 기억을 선택하지 못해 이곳에서 일하며 삶을 반추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게 됐다는 얘기가 있다. 기억을 다운로드해 새로운 몸에 업로드한다는 것이다. 삶은 기억으로 구성되고, 사람은 기억을 담은 존재이다. 기억되지 않으면서 죽는 것이고, 기억하지 못하면서 죽는 것이다. 태아는 기억하는 그리고 기억되는 존재일까, 존엄하게 기억되려는 마음도 권리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 기억과 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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