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이 '관계 영상' 삭제를 거부합니다
헤어진 연인이 '관계 영상' 삭제를 거부합니다
단순 보관도 처벌 가능할까?

이별 후 합의하에 찍은 관계 영상 삭제를 요청했지만 무시당한 A씨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셔터스톡
A씨의 이별은 순탄치 않았다. 상대방의 불성실한 태도로 신뢰가 무너진 끝에 관계를 정리했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관계 영상'이었다.
A씨는 이별 후 상대방에게 영상 삭제를 정중히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모를 유출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A씨는 법적 절차인 내용증명을 세 차례나 발송하며 삭제를 재차 요구했다. 상대방이 내용증명을 모두 수령한 사실은 확인됐지만, 침묵은 계속됐다. 일상과 직장생활이 무너질 정도의 불안 증세는 결국 A씨를 정신건강의학과로 이끌었다. A씨의 고통은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을까.
유포 없으면 수사도 어렵다
가장 큰 쟁점은 '동의' 하에 촬영된 영상을 상대방이 삭제하지 않고 단순히 보관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느냐다.
다수 변호사는 형사 처벌은 어렵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민경철 변호사(법무법인 이엘)는 "당사자 간 합의하에 촬영된 영상은 카메라등이용촬영죄를 구성하지 않으며, 촬영물의 단순 소지도 당연히 범죄로 볼 수 없다"면서 "삭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형사처벌도 가능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즉, 영상이 유포되거나 이를 빌미로 협박하는 등 추가적인 범죄 행위가 없다면, 단순 보관만으로는 강제 수사를 하거나 처벌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민사 소송 가능성, 엇갈린 시선
형사 처벌이 어렵다면, 민사 소송을 통한 손해배상은 가능할까. 이 지점에서 변호사들의 견해가 엇갈렸다.
일부는 '인격권 침해'를 근거로 위자료 청구가 가능하다고 봤다.
서아람 변호사(변호사 서아람 법률사무소)는 "연인 간 합의하에 촬영된 성적 영상이라 하더라도, 이별 후 상대방의 삭제 요구가 있었다면 즉각 응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며 "이를 장기간 무응답으로 회피하며 정신적 고통을 준 경우,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씨가 받은 정신과 진료 기록, 세 차례 발송한 내용증명 등은 상대방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를 입증하는 핵심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소송의 실익이 거의 없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조기현 변호사(법무법인 대한중앙)는 "민사소송을 제기할 경우 불법행위와 손해 발생 등에 대한 모든 입증책임은 A씨에게 있다"며 "설령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인정되는 손해배상액은 극히 소액일 것이라 변호사 선임 비용을 고려하면 소송의 실익이 사실상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삭제 확인도 어렵다
A씨가 가장 원하는 것은 '영상을 완전히 삭제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사소송만으로 상대방의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강제로 수색해 영상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민경철 변호사는 "법원이 영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릴 가능성은 없다"며 "설령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강제집행이 불가능한 민사절차상 촉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다만 방법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한병철 변호사(법무법인 대한중앙)는 소송 과정에서 법원에 '문서제출명령'이나 '사실조회'를 신청해 상대방이 영상의 존재 및 보관 여부에 대해 밝히도록 압박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이는 직접적인 강제 수단은 아니지만, 재판 과정에서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