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건인데 누구는 9000만원, 누구는 1000만원⋯이유는 '처분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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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건인데 누구는 9000만원, 누구는 1000만원⋯이유는 '처분권주의'

2020. 01. 20 11:51 작성
장성수 변호사의 썸네일 이미지
ss.jang@lawcompan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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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을 건 부분'만 판단하는 법(法)

법을 모르는 소외계층을 위한 제도적 지원 부족

민간·기술을 활용한 법률지원, 제도권 편입 방안 필요

지난해 11월 27일 광주 서구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와 시민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활동가들이 일본 정부, 미쓰비시중공업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 징용 피해자 등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본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 연합뉴스

일본 전범기업의 후신인 '미쓰비시 중공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1000만원을 보상하라는 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그런데 언론의 기사를 읽다 보면 의문이 든다.


"재판부는 김씨에 대해서는 과거 선고된 유사 사건들의 사례를 고려해 미쓰비시가 부담해야 할 위자료 액수로 9000만원을 인정했다. 다만 김씨가 청구한 위자료가 1000만원인 관계로 그 범위 내에서 최대한인 1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연합뉴스)


그간 9000만원을 인정해 왔고, 타당한 내용이라면 이번에도 9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해야 하지 않는가? 왜 1000만원만 배상하라고 판결하는가? 힘들게 삶을 살아온 강제징용 피해자분들이 무슨 법을 알겠는가? 법을 잘 아는 법원이 알아서 적절한 배상액을 산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간의 칼럼을 읽어 온 독자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형사소송에서 법원은 검찰이 공소를 제기한 부분에 한하여 가부를 판단한다.


민사소송도 마찬가지다. 민사소송법 제203조는 처분권주의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당사자가 소로 구한 사항이 아니라면 법원은 판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즉, 당사자가 구한 부분에 대해서만 판단하겠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1000만원의 손해배상액이 인정될 사건이라도 당사자가 500만원만 청구하였다면,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한 500만원의 범위를 벗어나 판결할 수 없다.


민사소송법 제203조(처분권주의)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하여는 판결하지 못한다.


왜 이렇게 하는가? 재판은 결국 재판의 양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 사이의 문제이고, 적정한 청구를 하는 것은 각 당사자의 책임이다. 법원의 역할은 중립을 지키며 공정한 판단을 하는데 머문다. 법원이 당사자가 구하는 범위를 넘어 판단하는 경우 누군가는 유리하고, 상대방은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구한 범위를 초과해서까지 법원이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면 업무 범위를 한정할 수 없다는 문제점도 있다.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정해져 있는데, 혹시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쟁점을 찾고자 사건을 필요 이상으로 깊게 살펴야 할 수도 있다. 추가된 비용은 다 국민의 몫이다. 게다가 비슷한 유형의 사건일지라도 판단 받는 범위가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법적 안정성이 해쳐질 수 있다.


법은 최소한이기 때문이라는 철학적 이유도 있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도덕과 양심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모든 것을 법으로 규정할 때 경찰국가가 된다. 시민의 자유는 사라지고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개인의 인권은 유린당한다. 법이 규정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자유의 범위는 줄어든다. 처분권주의는 이러한 법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법이 관여하는 범위가 이토록 적어 손해배상조차 제대로 줄 수 없다면, 법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은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 때 국가가 지혜롭게 관여해야 한다. 법을 모르는 국민들이 법률 서비스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지금도 법률구조공단 등을 통해 법률 소외계층을 돕고 있으나, 여전히 부족하다. 이러한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민간과 기술이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는 등 여러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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