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강요 무죄 취지 판결
대법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강요 무죄 취지 판결
논란 됐던 '안종범 수첩' 증거능력도 인정 안돼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으로 구속된 최순실씨가 법정에 나오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이 29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파기환송한 핵심 근거는 강요죄 때문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국정농단 사건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미르·K스포츠재단의 출연금 강요’ 혐의에 대해 “강요죄로 볼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이로 인해 이와 관련한 혐의들이 줄줄이 파기환송됐다.
재판부는 “강요죄는 협박으로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범죄인데 협박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발생 가능할 정도의 구체적 해악 고지가 있어야 한다”며 “행위자가 지위에 기초해 상대에게 어떤 요구를 했다고 해서 곧바로 해악 고지는 아니다"고 했다. 상대방에게 이익 제공을 요구할 때 그 상대방 역시 어떤 이익을 기대해서 응했다면 ‘해악의 고지’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이로써 앞선 2심 재판부가 강요죄로 인정한 △전경련과 대기업에 대한 재단 출연금 요구 △현대자동차그룹에 대한 납품 계약 체결 및 광고 발주 요구 △KT에 대한 채용·보직변경 및 광고대행사 선정 요구 △롯데그룹에 대한 K스포츠재단 관련 추가 지원 요구△삼성그룹에 대한 영재센터 지원 요구 △그랜드코리아레저 등에 대한 스포츠단 창단 및 영재센터 지원 요구 △포스코그룹에 대한 스포츠 창단과 용역계약 체결 요구 등은 모두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됐다.
최 씨는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해 미르·K스포츠재단에 50여개 대기업이 774억원을 억지로 출연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대기업의 팔목을 비틀어 자기가 세운 신생 재단에 돈을 내도록 강요한 이 혐의는 ‘국정농단’ 사태를 대표하는 의혹이었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일부 무죄가 됐다.
이 의견에 반대한 대법관도 있었다. 민유숙 대법관은 별개의견에서 “묵시적 해악의 고지가 있었다고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면서 “사회평균인의 관점에서 볼 때 강요죄의 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다수 의견은 경험법칙에 반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이날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작성한 업무수첩의 증거능력도 최종적으로 부정했다. 이른바 '안종범 수첩'으로 불린 이 업무수첩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이 독대(獨對)한 내용을 안 전 수석이 사후에 기록한 것으로 특검 수사 당시부터 "국정농단 전체를 입증할 사초(史草)이자 핵심증거"로 여론의 관심을 받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열린 상고심에서 “안종범 업무수첩 내용이 박근혜와 이재용의 대담 내용에 대한 증거로 쓰일 경우라면 전문 진술에 해당하므로 간접사실의 증거로도 사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우리 법원은 전문증거 배제원칙을 세우고 있다. 전해 들은 것은 직접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독대' 때 안 전 수석은 배석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대기업 총수의 독대를 마친 뒤 안 전 수석을 만나 면담 내용을 불러줬고, 안 전 수석이 이를 수첩에 기록했다. 그렇기 때문에 수첩에 나오는 메모가 곧 박근혜·이재용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아닐 수 있다는 논란이 있어 왔다.
앞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1심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단독 면담 후 면담에서 오고 간 대화 내용을 안 전 수석에게 불러줘 이를 수첩에 받아 적은 사실은 간접사실에 대한 정황증거로 사용하는 범위 내에서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시했다.
이로 인해 이재용 부회장도 재판에서 불리한 상황에 몰렸다. 이 부회장 1심 재판부는 "안종범 업무수첩은 안종범의 진술과 결합해 (박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 등을 인정할 간접사실에 대한 증거로서는 전문증거가 아닌 본래 증거로서의 증거능력과 증거가치를 가진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른 판결을 내렸다. "안종범의 업무수첩은 안종범이 사무처리의 편의를 위하여 자신이 경험한 사실 등을 기재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은) 고도의 신용성에 관한 정황적 보장이 있는 문서라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창현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형사법 전공)는 “전문 증거에 해당하는 진술서, 진술기재서 등의 증거능력은 어떤 사실에 대한 증거로 쓰는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재판부마다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면서 “안종범 수첩의 경우 안종범이 증거 동의를 하지 않고 내용 인정도 하지 않아 대법원이 원칙에 따른 결론을 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