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가스라이팅'이라 본 사례들⋯판결문 속 기준 들여다보니
법원이 '가스라이팅'이라 본 사례들⋯판결문 속 기준 들여다보니
사랑으로 포장된 교묘한 지배 '가스라이팅', 법원의 판단 기준은?
형사재판선 범행 수단·가중처벌 요소로, 민사선 손해배상 근거로 인정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사랑인 줄 알았던 그의 말이 어느새 나를 옥죄는 족쇄가 됐다. "네가 예민한 거야", "그런 적 없어, 네 기억이 잘못된 거야." 이런 교묘한 심리 조종, 이른바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법원이 칼을 빼 들기 시작했다. 연인이나 가족 등 친밀한 관계를 악용해 상대방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정서적 학대가 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가스라이팅은 그 자체로 처벌하는 법 조항은 없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폭행, 협박, 강간 등 각종 범죄를 가능케 한 '수단'으로 보거나, 죗값을 더 무겁게 매기는 '가중처벌 요소'로 판단하고 있다. 법원이 어떤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인정하고 있는지, 판결문을 통해 기준을 분석했다.
형사 법정 오른 '가스라이팅'⋯핵심은 '심리적 지배'
법원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리를 완전히 장악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막았다고 볼 수 있을 때 가스라이팅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창원지방법원은 상습특수상해 사건에서 "피고인은 피해자들에게 부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고 신뢰를 얻는 방법으로 쉽게 피해자들의 심리를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른바 '가스라이팅 범죄'에 해당한다"고 명시했다(2021. 8. 19. 선고 2021고합219 판결). 가스라이팅을 잔혹한 범죄의 핵심 수단으로 본 것이다.
서울남부지법 역시 유사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자신보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취약한 피해자를 대상으로 심리를 지배한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며 가스라이팅 범죄임을 분명히 했다(2022. 2. 16. 선고 2021고합466 판결).
형량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서울고등법원은 공갈, 강간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위압적인 태도와 폭언 및 이른바 '가스라이팅'을 행함으로써 피해자로 하여금 피고인의 말에 함부로 거역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한 다음 범행했다"며 이를 양형에 불리한 요소로 고려했다(2023. 6. 20. 선고 2023노820 판결).
'심리적 지배' 상태를 '객관적 증거'로 입증해야
하지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주장만으로 법원이 모두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 지배 상태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지가 판결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열쇠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의 한 강간 사건 판결이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2024. 7. 18. 선고 2024노263 판결).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두 사람이 나눈 카카오톡 대화라는 '객관적 증거'를 근거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피고인의 말투를 지적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반면, 피고인은 대부분 '알겠어, 노력할 게, 미안해'와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며 "이에 의하면 오히려 피고인이 피해자 앞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다고 보이기도 한다"고 판단했다. 즉, 객관적 증거를 볼 때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지배당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결국 법원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리를 지배했는지 △행위가 장기간 반복됐는지 △피해자의 취약성을 이용했는지 등을 판단하기 위해 카카오톡 대화, 녹취, 제3자 증언과 같은 객관적 증거를 꼼꼼히 살핀다.
민사소송에서도 쟁점 "명예훼손 될 수도"
가스라이팅은 민사 소송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된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불법행위가 인정되려면 가스라이팅 행위가 사회 통념상 용인될 수 없는 수준이어야 하고, 이로 인해 실제 손해가 발생했다는 점이 입증돼야 한다.
반대로,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가스라이팅 가해자"라고 지목했다가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한 배우가 연인에게 '가스라이팅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법정 다툼으로 번진 것이 대표적이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23. 11. 10. 선고 2021가합548833 판결). 이 경우엔 가스라이팅 주장이 사실인지, 또 그 주장이 공익을 위한 것이었는지가 재판의 핵심이 된다.
형사재판은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지만, 민사재판은 어느 쪽 증거가 더 우세한지를 따져 판단한다. 가스라이팅은 객관적 증거 확보가 어려워 법적 다툼이 쉽지 않지만, 법원이 점차 그 심각성을 인정하고 있어 관련 판례는 계속 쌓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