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판례의 무게...잘못된 것 변경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진 않아야
[학술] 판례의 무게...잘못된 것 변경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진 않아야
판례의 변경은 어떤 경우에 허용되어야 하나
윤진수 교수 "잘못된 판례는 변경을 원칙으로"
![[학술] 판례의 무게...잘못된 것 변경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진 않아야 기사 관련이미지](https://d2ilb6aov9ebgm.cloudfront.net/2019-07-31T14.24.29.582_792.jpg?q=80&s=832x832)
"판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 이미지 편집 : 김주미 기자
1957년부터 2012년까지 55년의 기간 동안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변경한 것은 188건이다. 기존 판결을 뒤엎는 판례가 한 해 평균 3.4건이 나온 셈인데, 이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다.
대법관을 역임했던 이재성 변호사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많은 대법관들이 판례변경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심지어는 그 판례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지금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사정 설명에는 동의하면서도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는데 지금 당장 바꿀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등 판례를 준수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대 대법관들은 판례변경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관들이 이처럼 판례변경에 소극적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러한 소극적 태도는 타당한 것일까?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윤진수 교수는 2018년 12월, 한국법철학회 ‘법철학연구’ 21권 3호에 게재한 논문 ‘판례의 무게 (판례의 변경은 얼마나 어려워야 하는가?)’에서 이 문제를 고찰했다.
윤 교수는 “판례의 변경이 한편으로는 어려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 행해진다면, 판례의 변경은 어떤 경우에 허용될 수 있는가. 그 한계는 없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판례가 변경될 때,
반대 견해는 어떤 이유로 막아서는가
아내강간죄 판례(2012도14788 등 전합체 판결)는 세간의 화제가 됐던 사안이다. 혼인 관계가 실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편이 아내를 강간했을 때,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는가를 다루었다.
대법원은 종래 70도29판결에서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때에는 설령 남편이 아내를 강제로 간음했다 하더라도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강간죄의 주체에 남편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전합체 판결 다수의견은 혼인 관계가 실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도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하여 판례를 변경했다.
이 판결의 반대의견은 “장기간 유지되면서 강간죄의 구성요건 해석에 관하여 실질적인 규범력을 형성했던 종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면, 그 변경 전에 이뤄졌던 행위가 모두 처벌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마찬가지 판례변경 사안으로 주목받은 판결은 95도2870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구 건축법 제57조의 양벌규정이 위반행위의 이익귀속 주체인 업무주에 대한 처벌규정임과 동시에 행위자의 처벌규정도 되는지가 문제됐다.
종래 판례는 “위 조항이 행위자 처벌규정은 아니므로 위 규정을 근거로 실제 행위자를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해 왔다.
하지만 전합체 판결의 다수의견은 “행위자 처벌규정임과 동시에 그 위반행위의 이익귀속 주체인 업무주에 대한 처벌규정이기도 하다”고 하여 판례를 변경했다.
반대의견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국민의 법의식상 대법원 판례의 해석이 사실상 구속력이 있는 법률해석으로 자리 잡게 된 경우에는, 국민에게 불이익한 방향으로 그 해석을 변경하고 위와 같은 대법원 판례들을 소극적으로 변경하려는 것은 형사법에서 소급입법 금지의 원칙을 선언하는 헌법의 정신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경로(經路)의존성’ 띠는 법관의 선례 존중,
규범적으로도 타당할까
윤진수 교수는 법관이 선례를 존중하는 경향을 ‘경로(經路)의존성’으로 설명했다. 선례 구속이나 선례 존중은 법에서 경로의존성이 발현된 전형적인 예라는 것이다.
경로의존성이란, 어떤 결과나 결정이 그에 이르게 된 경로에 영향을 받는 것을 뜻한다. 일단 하나의 경로나 제도가 선택되면, 선택될 수 있었던 다른 경로나 제도는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더이상 선택되지 않고, 사람들은 이미 선택된 경로나 제도를 따르게 된다.

일단 하나의 경로나 제도가 선택되면, 사람들은 이미 선택된 경로나 제도를 따르게 된다. / 이미지 출처 : 셔터스톡
경로의존성에 의해 우리 판례도 대체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일단 어떤 판례가 만들어지면, 그 후에 법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판례를 따르는 것이다. 이 같은 특성은 잘못된 판례를 바로잡는 법원의 자기교정 기회를 가로막는다는 단점이 있다.
윤 교수는 그밖에도 법관이 선례를 존중하게 되는 사실상의 이유들이 있다며, 그러한 사유들을 규범적 관점에서 하나하나 반박했다.
첫째로, 선례를 존중하는 것은 법관의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는 이점이 있다. 법관이 모든 법률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려면 에너지 소모가 크고, 경험적으로 선례가 잘못될 확률은 크지 않기 때문에 선례에 의존하는 것이 대개는 경제적이면서 효율적이다.
하지만 윤 교수는 “판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을 때 법관으로서 그에 대해 재검토하고 답변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며 반박했다.
둘째로, 법관 자신도 틀릴 수 있고 종전의 판례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을 것이므로, 겸양의 마음에서 신중을 기하려는 자세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이런 이유는 판례변경을 주저할 사유는 될 수 있겠지만 판례를 변경해선 안 되는 규범적 논거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셋째는 법원이 판례를 자주 변경하면 일반 국민의 법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다.
하지만 윤 교수는 “국민이 법원에 보내는 신뢰는 재판 내용과 결론에 달린 것이지 판례를 변경했다는 이유만으로 신뢰가 떨어진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잘못된 판례를 계속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법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판례변경을 가로막는 가장 타당한 근거,
‘법적 안정성’
윤 교수는 선례를 존중해야 한다면 그 규범적 근거는 ‘법적 안정성’이 된다고 봤다. 이는 신뢰 보호 내지 예견가능성의 문제로 귀착되는데, 법치주의 원리에서 파생되는 헌법상 원리이기도 하다.
판례변경에서 신뢰보호가 문제되는 것은 종전 판례를 신뢰했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하였거나 취하지 않다가 판례가 변경되어 손해를 입은 경우나, 판례변경으로 인해 새로운 조치를 해야 하는 부담을 지는 때이다.
물론 모든 판례변경에 신뢰보호 문제가 따르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판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또 일반인이 판례를 신뢰했다 하더라도 그 신뢰에 보호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안정성이 판례변경에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이 분명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려해야 할까?
윤 교수는 “판례변경으로 인한 이익과 변경으로 인한 법적 안정성 침해를 비교해야 한다”고 말했다. 판례변경으로 인한 이익이 판례변경으로 인한 손실보다 크다면 판례는 변경되어야 하고, 그 반대라면 판례는 변경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판례변경으로 인한 이익과 손실은 꼭 경제적 이익으로 환산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양자를 비교선상에 둘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윤 교수는 이를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이라고 말하며 “하나의 원칙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가 제안한 원칙은 “종래 판례가 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면 이를 변경할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법적 안정성 침해를 이유로 판례변경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의하여 판례변경으로 인한 이익은 일반적으로 판례변경으로 인한 손실보다 크다고 추정이 된다. 따라서 손실이 이익보다 크다는 점은, 판례변경을 반대하는 측에서 논증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다만 법원으로서는 판례를 변경하고자 할 때 그 변경이유를 상세하게 설시해야 한다는 게 윤 교수의 주장이다. 과거 일부 대법원이나 헌재 판례처럼 판례변경의 이유를 제대로 설시하지 않거나, 심한 경우 판례변경임을 밝히지 않고 사실상 판례변경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판례를 변경해선 안 되는 경우란 어떤 경우일까?
윤 교수는 “판례변경으로 인해 큰 혼란이 야기되거나 거래가 마비될 정도라면 판례변경을 해선 안 되는 사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예로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지폐 발행 허용 판결을 들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의 의사는 지폐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었기에, 지폐 발행을 허용하는 판결은 맞지 않는 판결이 되어 윤 교수의 원칙에 따르면 변경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지폐의 사용이 당연시되기에 이르렀고, 지폐 발행을 허용했던 판례를 변경한다면 경제를 마비시키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판례를 변경해선 안 되는 사유에 해당하는 것이다.
당연히 판례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잘못된 판례를 변경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무게가 무거워서는 안 된다”는 게 윤 교수의 주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