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속 베틀 대결, 한국 법정에 선다면?⋯제우스 불륜 수놓은 아라크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베틀 대결, 한국 법정에 선다면?⋯제우스 불륜 수놓은 아라크네는
아테나에게 도전장 내민 아라크네
제우스 불륜 수놓아
사실적시 명예훼손과 모욕죄 여부 검토해 보니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올림포스 최고 신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해 유부녀를 유혹하는 불륜 현장을 만천하에 공개한 인간 여성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베 짜는 처녀 '아라크네'의 이야기다.
그녀는 이 대담한 폭로의 대가로 여신 아테나의 분노를 사, 결국 평생 실을 뽑는 거미가 되는 비극을 맞았다.
그렇다면 아라크네가 2026년 대한민국 법정에 선다면 어떨까.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제기된 "사실적시 명예훼손 아니냐"는 누리꾼들의 의문을 현행 형법을 기준으로 파헤쳐 봤다.
"신에게 배운 적 없다"…오만함이 부른 파국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가 놀랄 만큼 뛰어난 인간 처녀였다. 그녀가 베를 짜면 사람들은 물론 숲의 요정들까지 몰려와 구경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공예의 여신 아테나에게 직접 배운 솜씨라며 감탄했지만, 아라크네는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았다"며 이를 강하게 부정했다.
심지어 아테나와 직접 솜씨를 겨뤄보고 싶다며, 자신이 지면 기꺼이 벌을 받겠다는 도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노파로 변신해 "신과는 경쟁하지 말라"며 충고하러 온 아테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신과 인간의 위험한 직조 대결이 막을 올렸다.
제우스 불륜 수놓은 아라크네, '사실적시 명예훼손' 꼼짝없이 성립
대결이 시작되자 아테나는 올림포스 열두 신의 영광을 그려 넣은 반면, 아라크네는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해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에게 다가가는 등 신들의 낯뜨거운 추문을 천에 수놓았다.
이 행위는 현행법상 명백한 범죄다. 형법 제307조 제1항에 따른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죄가 성립하려면 다수가 인식할 수 있는 '공연성'과 구체적 '사실의 적시', 그리고 '명예훼손'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아라크네는 다수의 관중 앞에서 대결을 펼치며(공연성), 신들의 불륜이라는 구체적 사실을 시각적으로 묘사해(사실 적시), 신들의 사회적 평가를 깎아내렸다(명예훼손).
아라크네는 "사실을 그대로 나타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진실을 말했더라도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진실을 말했을 뿐" 항변…공공의 이익 없어 면죄부 불가
우리 형법 제310조는 폭로한 내용이 진실이고 오직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처벌하지 않도록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아라크네는 이 좁은 구멍마저 빠져나가기 어렵다.
법원은 공공의 이익 여부를 판단할 때 전달 대상과 표현 방식, 범행 동기 등을 엄격하게 따진다.
아라크네의 폭로는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로지 아테나와의 대결에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신들의 권위에 흠집을 내기 위한 개인적 경쟁심에서 비롯된 목적이 크기 때문이다.
신을 향한 도발 자체는 무죄? '모욕죄'의 엄격한 잣대
그렇다면 아라크네가 아테나에게 "여신님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며 당돌하게 대결을 요구한 행위 자체는 어떨까.
형법 제311조의 모욕죄는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지 않고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깎아내릴 만한 경멸적 감정을 표현할 때 성립한다.
법원은 상대방의 주관적 감정이 아닌 당사자들의 관계와 객관적인 정황을 기준으로 모욕죄를 판단한다. "다소 무례한 방법으로 표시되었다 하더라도 모욕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일관된 판례다.
즉, 아라크네의 행동이 단순히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한 경쟁적 도전에 그쳤다면 모욕죄로 처벌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결 과정에서 선을 넘어 아테나를 향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조롱이나 욕설이 섞였다면 모욕죄가 성립할 여지가 충분하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그리스 신화 시대가 아닌 현대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영원히 거미줄을 치는 저주 대신 최소 벌금형에서 최대 징역형이라는 무거운 형사 처벌 굴레를 쓰게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