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하고 있던 거였어" 그루밍의 덫에서 스스로 나오게 한 성교육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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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하고 있던 거였어" 그루밍의 덫에서 스스로 나오게 한 성교육의 힘

2020. 02. 12 15:19 작성2020. 02. 12 16:03 수정
안세연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sy.ahn@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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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톡뉴스 기획 취재] 그루밍 범죄의 민낯 ④

피해자가 범죄를 신고하게 된 계기 '성교육'

피해자들에게 은밀하게 지속되던 '그루밍 성범죄'가 멈춰진 건, 예상외로 성교육 덕분이었다. 해당 사진은 사건과 관련 없음. / 게티이미지코리아

은밀하게 지속되던 '그루밍 성범죄'가 멈춰진 건, 예상외로 성교육 덕분이었다. 그루밍 성범죄를 유죄로 선고한 판결문에서 피해자들은 "학교에서 성교육을 들으면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말했다. 누구에겐 뻔하고 지루한 시간이었을 성교육 시간.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에게는 범죄를 범죄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판결문에서 피해자들이 언급한 성교육은 모두 의무교육으로 진행된 수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업에 특별한 내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데도 강제로 몸을 만지면 범죄"라는 당연한 내용들이었다. 피해자들은 수업을 듣고 나서, 그때부터 범죄에 맞서기 시작했다.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 한 피해자들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심리적⋅정서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행을 가하는 것이다. 지배 과정을 '길들인다'는 의미에서 그루밍(grooming)이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자신이 성범죄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등학교 6학년 A양은 채팅을 통해 한 '아저씨'를 알게 됐다. A양은 "또래랑 노는 것보다 '아저씨'가 나이도 많고, 같이 놀면 사주는 것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아저씨의 "사귀자"는 제안을 승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아저씨는 한참을 잘해주다가 "사귀는 사이에서는 이런 걸 하는 거야"라며 성적 착취를 시작했다. A양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영어학원 선생님에게 당한 중학교 1학년 B양도 마찬가지였다. B양은 "그동안 선생님이 자신에게 너무 잘해줘서 그게 추행이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저 좀 이상하게 친절함을 베푼다'고 생각했다. "보강 수업을 하자"고 하고선, 둘이 남은 강의실에서 청진기를 B양의 가슴에 갖다 대거나 "피로를 풀어주겠다"며 허벅지와 종아리를 주물렀을 때조차도 범죄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아빠 친구'에게 용돈과 아르바이트비를 지속적으로 받은 C양도 비슷했다. 가난한 C양에게 연거푸 호의를 베풀어 신뢰를 쌓은 뒤, 점차 C양을 주변과 고립시켰다. 그 뒤에는 성적 착취가 있었다.


재판부도 인정⋯범죄 인식 계기는 "성교육"

세 사건에서 '그루밍의 늪'에 빠진 피해자들은 짧게는 8개월, 길게는 6년 동안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혼자 견뎠다. 그러다 성교육 시간을 계기로 그 늪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한 피해자는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늪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A양은 "성교육을 듣고 나니 내가 (아저씨와) 한 성관계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B양도 "학교에서 성교육 수업을 듣고 '그루밍이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C양 역시 "당시에는 막연히 싫다는 감정만 있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루밍에 대해 배우고 확실히 인지했다"고 밝혔다.


재판부 역시 피해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한 재판부는 이렇게 판시했다.


"피해자는 자신이 피고인으로부터 추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후 학교에서 이루어진 성교육 등을 통해 자신이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문가들 "성교육, 실시하는 것만으로도 효과 있어"

성범죄 사건 상담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의 효과는 상당하다"고 말했다.


'가족과 성건강 아동청소년상담소' 관계자는 "성폭력 교육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정말 다르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교육 시간에 아이들이 소홀히 한다고 해도, 성폭력 예방 교육을 실시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성폭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유승진 사무국장 역시 "성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자신의 피해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며 "실제 단체에 접수되는 피해사례도 온라인 그루밍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상담한 사건 463건 중에서 온라인 그루밍은 26건이었는데, 대부분(23명⋅88.4%)이 20세 미만 피해자였다. 나머지 3건도 20대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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