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4)] 사표 쓰세요!
[정형근 교수 에세이 (4)] 사표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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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새벽 비상소집에 나오지 않았다고 사표를 쓰라는 것인가 싶었다. / 이미지 편집 : 김주미 기자
전국 비상계엄 철폐를 외치는 데모가 연일 계속되었다. 검찰청 도로 양편에는 총검을 한 계엄군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무장한 군인들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었다.
계엄 상태라 육군 중령이 한껏 목에 힘을 주고 검사장실을 드나들기도 했다. 아무리 계엄 상황이라도 저런 장교가 검사장실에 폼 잡고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정말 군인들 살판났구나!” 생각이 들었다.
영장계에는 데모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엄청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얼마 후에 수형계에서 서무과로 옮겨가게 되었다.
서무과에서는 대검찰청 또는 법무부에 긴급하거나 중요한 문서를 전달할 때는 직접 직원이 서류를 들고 출장을 가는 일이 많았다. 이런 출장은 내가 전담했다.
내가 가장 신입직원이고, 집도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거의 매주 서울을 가야 했다. 어쩌면 이런 업무를 맡기려고 나를 서무과로 옮겼는지 모른다.
급히 보고해야 할 서류가 있을 때는 관용차 운전기사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김해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덕분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평소에는 새마을호 기차를 이용했다. 그때는 철도청에서 검찰청에 제공한 무임승차권을 소지하였다. 철도청에서 두 장의 무임승차권을 부산지검에 제공하였는데, 한 장은 검사장이 사용하고, 한 장은 서무과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기차역에서 무임승차권을 제시하면, 항상 특실 좌석을 배정해 주었다. 기차가 거의 출발하는 시간에 임박하여 역에 도착하더라도 좌석이 제공되었다.
이렇게 서울 출장을 갈 때는 답십리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들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서무계장은 항상 출장 업무를 마치는 즉시 부산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법무부가 있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서울역으로 이동하여 부산행 기차를 타야했다.
1980년 6월경 평상시처럼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그런데 직원들이 전부 출근해 있었다. 그때 시간이 8시 반 무렵으로 출근시간 9시가 되기 훨씬 전이었다.
나 혼자 뒤늦게 지각하여 출근한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게 뭔 일이지?” 어리둥절하면서 2층에 있는 서무과로 올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새벽녘에 전 직원들을 비상소집하였다고 했다. 비상연락망을 통하여 직원들 한명 한명에게 전화를 하여 새벽에 출근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비상연락망에 기재된 나의 하숙집에도 비상소집을 위한 전화를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새벽녘 잠결에 전화를 받았던 주인 할머니가 귀찮아서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무실 출입문 입구에서 순간적으로 멍해 있는 나를 힐끔 쳐다본 서무계장이 퉁명스럽게 한 마디 했다. “정형근 씨, 사표 쓰세요!”
순간 새벽 비상소집에 나오지 않았다고 사표를 쓰라는 것인가 싶었다. 아니면 발령 받은 지 기껏 두 달도 될까 말까 하는데, 그 사이에 뭘 잘못했다고 사표를 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직원들도 새벽에 나오느라 아침을 못 먹어서인지, 사직원을 제출한 것 때문인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완전 가라앉아 있었다.
사표를 쓰라는 말에 매우 황당한 표정으로 있는 나에게 옆에 있던 선배가 한 마디 했다. 부산지검 직원들 전체가 일괄적으로 사직원을 제출한 상태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표를 쓰라고 했다.
실제로 검사를 제외한 전 직원들이 새벽에 출근하여 사직원을 제출하라는 말에 따라 사표를 제출해 둔 상태였다. 모든 직원이 냈다는 말에 “아! 나만 사표 내는 건 아니구나.” 다소 안도가 되었다.
그런데 왜 꼭두새벽에 모든 직원을 비상소집해 놓고 사직원을 내라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무원이 좋다는 게 신분보장이 확실하다는 것인데, 이렇게 전 직원들을 새벽에 불러놓고 사직원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불만이 치밀어 올랐다.
종이 한 장을 책상에 올려놓고 미적거리고 있는 나를 향하여 선배가 한 마디를 더 했다. “정형근 씨는 우리 청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사표 수리될 사람이야!” 내가 부산지검에서 가장 최근에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 내 뭘 잘못했다고 내 사표를 수리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그 선배에게 사표는 어떻게 쓰는 거냐고 물었다. “마, 일신상의 사유로 그만둔다고 해라!” 답답하다는 듯 이번에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사직할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으면서 사직원을 제출했다. 그러면서도 수리는 되지 않도록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원을 제출합니다.”라고 아주 짧게 적었다.
수리해 달라는 의사표시는 빈말이라도 쓸 수 없었다. 검찰공무원이 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아무리 가짜라고 할지라도 사직서를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사직서를 돌려받지 못하면, 바로 의원면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그 분위기에서 나 혼자 안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의례적인 행사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모든 직원이 전부 제출했다는 사실 때문에 안정감이 들었다.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볼펜으로 사직원을 써서 서무계장에게 건네주었다. 그랬더니 계장은 내가 준 사직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받아 수북한 서류뭉치 위에 던져놓듯이 올려놨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80년 5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해 7월부터 9월까지 공무원과 정부산하기관 직원을 대규모로 해직시킨 사건이 바로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명분은 ‘공직자 정화계획’이라고 하여 비리와 무능한 공직자들을 쫓아낸다고 했지만, 실제 의도는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벌였던 불법행위였다.
마치 전쟁이 난 것처럼 새벽에 비상소집을 한 후 사직원을 제출하라고 하니까 내지 않을 길이 없었다. 그 당시는 비상계엄 상태이고,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살벌한 정권탈취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던 때였다. 누구 하나 왜 사직원을 제출하라고 하느냐고 항의하거나 묻지도 않았다.
뒤에 알게 된 것은, 그 당시 상부에서는 사표를 제출받아 의원면직 형식으로 해직시킬 숫자를 특정하여 부산지검에 통보해 놓은 상태였다. 내가 사직원을 서무계장에게 제출한 후 얼마 지나자, 서무과에서는 그 사직원 수리대상자를 선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냥 형식적으로 제출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 작업은 서무과장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먼저, 그 동안 징계처분을 받은 전력자를 찾는 작업을 했다. 공무원 인사기록카드를 전부 꺼내놓고 징계처분을 받은 사실이 적혀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직원들이 몇 백 명 정도가 되었기에 그 인사기록카드를 전부 확인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확인 결과 징계처분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공무원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숫자만으로는 의원면직 대상자 숫자를 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소한 잘못으로 시말서(경위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자를 찾기 시작하였다. 시말서는 별도의 보관함에 보관 중이었다. 시말서는 징계처분을 할 만한 비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근무기간 확립차원에서 경고하기 위해서 받아 둔 것이었다.
시말서를 제출한 경우로는, 모든 직원은 출근시에 서무과에 비치된 출근카드에 직접 싸인을 해야 하는데, 지각을 하게 될 경우에 다른 직원에게 부탁을 하여 대신 싸인을 하도록 한 경우에 적발되면 어김없이 시말서를 받았다. 대개는 출근카드 두 장을 꺼내놓고 싸인을 하다가 적발되곤 했다.
그리고 일요일에 일손 돕기 차원에서 모내기 봉사활동을 가는 날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않고 외부에서 식사하고 온 경우에도 외식금지명령을 위반하였다고 시말서를 받았다. 서무과 고참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검찰청 출입문에 서 있다가 외부에서 식사를 하고 온 직원을 적발하여 시말서를 받았다. 밥 먹는 것까지 참견하는 정말 째째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징계처분을 받은 것도 아니라서 평소에는 시말서를 썼더라도 어떤 불이익이 없었다. 그런데 전두환 군부세력이 비리 공무원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일정 인원을 무조건 면직시키라고 하니, 시말서를 작성했던 공무원도 사직원의 수리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공무원은 형의 선고·징계처분 또는 이 법에 정하는 사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의사에 반하여 휴직·강임 또는 면직을 당하지 아니한다.”는 법 조항도 무력해진 시대였다.
편집자 주
법조와 법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경희대 로스쿨 정형근 교수가 지나 온 감동의 라이프 스토리를 연재로 전한다. 또래 아이들이 등교할 때 그는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으나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된다. 만학도로서 법대 진학에 성공한 기쁨도 잠시, 그해에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깊은 비탄을 안고 사법시험을 준비한 끝에 36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원을 충원하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된다. 그는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