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이 건넨 음료를 마신 이웃이 숨졌다. 병 속엔 빙초산이 들어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건넨 음료를 마신 이웃이 숨졌다. 병 속엔 빙초산이 들어 있었다
'유족의 용서'가 형량 바꿨다

빙초산을 음료수로 착각해 건넨 시각장애인 A씨에게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셔터스톡
이웃에게 베푼 친절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돌아왔다. 시각장애인이 음료수로 착각해 건넨 빙초산을 마신 70대 남성이 숨지면서, 법원은 음료수를 건넨 피고인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인정했다.
평범했던 아침, 끔찍했던 비극의 시작
2023년 9월 25일 오전, 울산의 한 아파트 평상에서 시작된 평범한 대화는 비극의 서막이 됐다. 시각장애인 A씨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 C씨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음료수를 대접하기로 했다.
A씨는 집 냉장고에서 음료수 두 병을 들고 다시 평상으로 향했다. 한 병은 C씨에게, 다른 한 병은 C씨와 함께 있던 동네 이웃 B씨(70세)에게 건넸다. 고마움의 인사가 오갔을 그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B씨가 건네받은 병에 든 것은 음료수가 아닌 식용 빙초산이었다.
병을 받아든 B씨는 내용물을 그대로 들이켰다. 직후 B씨는 "속이 탄다, 답답하다"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구토 끝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그날 오후 '급성 독물중독'으로 숨을 거뒀다.
"앞이 안 보여 몰랐다"…법원의 판단은?
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 측은 "시각장애인으로서 병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었고, 이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주의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A씨는 사물의 구체적인 형태나 색 구별이 불가능한 '안전수동' 수준의 시력 상태였다.
결국 쟁점은 시각장애인인 A씨에게 어디까지 '주의의무'를 물을 수 있느냐로 모아졌다.
하지만 울산지방법원 정인영 판사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A씨의 시력으로는 두 병을 눈으로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병의 '촉감'에 주목했다.
B씨가 마신 빙초산 병은 2011년에 제조된 오래된 것으로 병목이 주름져 있고 겉면 종이가 일부 떨어져 있었다. 반면 C씨가 마신 '비타500' 병은 비교적 새것으로 표면이 매끈했다. 법원은 "촉감으로 구분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판부는 A씨가 10년 이상 혼자 살며 이웃집 환자를 돌보는 등 일상생활이 가능했고, 냉장고를 공간별로 나눠 관리해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어 "자신의 힘으로 구별할 수 없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음료를 받는 사람에게 재차 확인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유족의 용서'가 바꾼 형량
법원은 A씨의 과실을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금고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사망하는 중대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지적하면서도, A씨가 시각장애인인 점, 피해자 역시 술에 취한 상태에서 병을 확인하지 않고 마신 점 등을 참작했다.
특히 피해자의 유족들이 A씨와 원만히 합의하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 결정적인 양형 사유가 됐다.
[참고] 울산지방법원 2024고단699 판결문 (2024. 10. 15.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