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 의미'도 몰랐던 피해자와 "사랑했다" 주장하는 사람들
'성관계 의미'도 몰랐던 피해자와 "사랑했다" 주장하는 사람들
[로톡뉴스 기획 취재] 그루밍 범죄의 민낯 ①
최근 3년간 발생한 '그루밍 성범죄' 16건 전수 조사해봤다
"그루밍이다" 재판부가 인정한 판결 문 속 4가지 공통점

로톡뉴스는 최근 3년간 나온 판결문을 전수조사했다. 모두 16건의 사건을 확인했다. 13건은 유죄, 3건은 무죄였다. /박남규 디자이너
"21세기 가장 폭력적인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은 재판이 있다.
42세 연예기획사 대표가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면서 15살 여중생에게 접근해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가진 끝에 임신시킨 사건이었다. 여중생은 결국 출산까지 했다. 1⋅2심은 강간이라고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강간이 아니다"며 무죄로 뒤집었다. 유⋅무죄를 가른 건 여중생이 보낸 문자 메시지에 있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내용을 어떻게 봐야 할 지가 쟁점이었다. 여중생 측은 '그루밍(길들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연예기획사 대표(피고인)가 연예계 진출을 미끼로 접근해 신뢰 관계를 쌓고, 임신까지 시킨 뒤에는 어디에도 기댈 수 없도록 길들였다는 것이었다.
피고인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다. 결혼까지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검찰 측은 "피고인은 피해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동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여성 청소년에게 접근했다. 사랑이 아니다"고 맞섰다. 하지만 대법원은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이 나온 지 6년이 지났다. 지금의 사법부는 이같은 '그루밍에 의한 성폭행'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로톡뉴스는 최근 3년간 나온 판결문을 전수조사했다. 모두 16건의 사건을 확인했다. 13건은 유죄, 3건은 무죄였다.
분석 결과, '그루밍 유죄 판결문'에는 네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① 피해자는 성관계의 의미를 몰랐다.
② 피해자는 경제적⋅정서적으로 취약한 처지에 있었다.
③ 가해자는 취약한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물색했고,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그루밍을 했다.
④ 피해자는 가해자의 성적 착취에 제대로 반항하지 못했다.
판결문에선 그루밍 성폭행 피해자들의 비슷한 생활환경과 행동이 눈에 띄었다. 가해자들 또한 범행 과정에서 특정한 행동을 했다. 이 공통점들을 토대로 '그루밍' 성범죄의 성격과 특징을 분석해봤다.
만 13세 피해자에게 101회 음란행위 강요 및 6회 간음
지적장애 3급 피해자 성폭행
13건의 유죄 사건 중 12건의 성범죄 피해자들은 미성년자였다. 피해자들의 연령대는 10대 전후반으로 다양했다. 가장 어린 피해자는 8세였다.
미성년자가 아닌 경우는 1건이다. 피해자는 성인(41세)으로 지적장애 3급의 장애인이었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는 점은 "이들이 성관계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중간 결론으로 연결됐다. 수사기관에선 이런 점을 토대로 '위계⋅위력에 의한 간음'이란 쟁점을 부각시켰다. 압도 당하거나 속아서 성관계를 맺게 됐다는 주장이었다.
수사기관이 이런 논리를 짠 건, 피고인들이 백이면 백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방어 논리를 펼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피해자는 사랑의 의미나 성관계의 의미를 알지도 못했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주로 검찰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한 재판부는 관련 사건을 심리하면서 "피해자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성적인 접촉과 교류에 대한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며 "가해자가 피해 아동을 '위계(僞計)에 의해' 간음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설령 피해 아동이 성폭행을 당한 후에 피고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더라도 "아동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고 보았다.
몇몇 재판에서는 '정말 피해 아동이 성관계의 의미를 몰랐는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의료⋅아동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받았다. 유죄가 나온 사건들은 거의 모두 "피해자는 '성관계'의 의미를 몰랐다"는 감정 결과가 덧붙여져 있었다.
"왜 돈 벌러 공장에 안 가니?"
"그 남자는 착한 사람⋯"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보호막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거나 정서적으로 취약했다. 피해 아동들은 부모의 방임으로 '애정 결핍'이 된 상태에서 가해자를 마주치거나, 일부는 아예 부모의 학대를 피해 가출을 했다가 돈이 떨어진 상태에서 가해자를 만났다.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피해자 A양도 그런 경우다. A양은 어릴 적부터 '삼촌'이라 부르면서 따랐던 남성에게 성폭행당했다. 무려 6년간이었다. 그는 A양이 아르바이트하던 공장의 주인이었다. 그런데도 A양은 공장에 일하러 나갔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라며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B양도 비슷한 환경이었다. 중학생이던 B양은 채팅에서 만난 남성에게 음란 행위를 강요당하고 성관계까지 가졌다. 이 사건을 다룬 재판부는 "보호할 능력이 부족한 가정의 피해자에게 접근해서 피해를 가중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해자의 접근 시도를 피해자 가족이 차단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B양의 어머니는 "(가해자가) 착하고 거짓이 없으며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는 이유로 선처를 요청했다.
피해자들에게는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줄, 든든한 울타리가 돼 줄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편집자주
세 번째, 네 번째 공통점은 내일(7일) 보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