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문혁 교수의 '모르면 후회할 법 이야기'(12)] 계약서에 0을 하나 빠뜨리고 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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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혁 교수의 '모르면 후회할 법 이야기'(12)] 계약서에 0을 하나 빠뜨리고 쓰면?

2020. 08. 03 10:29 작성
호문혁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omoo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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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표시'의 불일치에 대하여

법은 의사표시를 한 사람이 착오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에 착오를 일으켰으면 그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고 하여 착오한 사람을 보호한다. /셔터스톡

의사표시는 속마음에 생긴 의사를 밖으로 표시하는 행위이므로, '의사'와 '표시'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의사표시는 의사와 표시에 차이가 없어서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가끔 둘 사이에 차이가 나는 수가 있다. 본래의 의사와 표시된 의사가 차이 날 때는 이를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본래의 의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입장에 서면, 의사표시가 있어도 그에 대응하는 내심의 의사가 없으면 그 의사표시는 효력이 없다고 본다. 반대로 객관적으로 표시된 의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입장에 서면, 내심의 의사가 없더라도 표시에서 추측되는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표시된 대로의 효과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 두 입장을 절충한 입장에서는 의사표시를 한 사람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내심의 의사를, 상대방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때에는 표시된 의사를 따르자고 한다.


우리 민법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절충적 입장을 취한다. 대체적으로는 계약과 같이 거래의 안전이 중요한 재산상의 법률관계에서는 표시된 의사를 따르는 경우가 있지만, 혼인⋅입양⋅상속과 같이 개인의 참된 의사가 절대적으로 존중되는 가족법 관계에서는 내심의 의사가 기준이 된다.


마음속의 의사와 표시된 의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중 가장 흔한 예가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이다. 이는 착오로 내심의 의사와 다른 표시를 하는 경우이다. 여러 나라의 달러가 다 같은 줄 알고 100 HKD(홍콩달러)라고 쓸 것을 100 USD(미국 달러)라고 쓴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500만원을 50만원이라고 쓴 것처럼 단순히 잘못 기재하거나 잘못 계산한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법은 의사표시를 한 사람이 착오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에 착오를 일으켰으면 그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고 하여 착오한 사람을 보호한다. 다만, 예를 들어 공장경영자가 대지가 그린벨트인지 관할 관청에 확인도 하지 않고 공장 신축 계약을 한 것과 같이, 그 직업 등에 비추어 마땅히 베풀어야 할 주의를 현저하게 게을리하였으면 '중대한 과실'로 인한 착오가 되어 취소가 불가능하다.


의사와 표시가 불일치한 다른 경우가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직할 생각도 없으면서 사직서를 제출하는 경우이다. 이를 '진의(眞意) 아닌 의사표시'라고 한다. 이 의사표시는 원칙적으로 표시된 대로 효과가 생겨서 상대방(회사)이 이를 받아들이면 직장을 잃게 된다. 그런 사람을 보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방(회사)이 그 표시가 진의가 아니라고 알았거나 보통 사람의 주의를 기울였으면 알 수 있었을 때는 상대방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서 그 의사표시는 무효이다. 하여튼 농담도 함부로 하거나, 객기를 함부로 부리다가는 큰일을 당할 수 있다.


마음에도 없는 의사표시를 상대방과 짜고 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거짓 의사표시를 '허위표시'라고 한다. 상대방과 통하였다고 '통정(또는 통모) 허위표시'라고도 한다. 전형적인 예가, 채무자가 자기 부동산에 대한 채권자의 강제집행을 막기 위하여 친척과 짜고 매매로 가장하여 소유권을 넘기는 경우이다. 이처럼 통모한 거짓 법률행위를 법에서는 가장(假裝)행위라고 부르는데, 이는 행위 당사자 사이에서는 언제나 무효이다.


다만, 이처럼 소유권이 이전된 겉모습을 믿고 새로 법률관계를 맺은 제3자에게는 그 가장행위가 무효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 위 예에서 가장 매수인이 다시 그 부동산을 제3자에게 매도하였는데, 그 제3자가 전에 그러한 가장행위가 있었음을 몰랐으면 두 번째 매매는 유효이어서 제3자는 소유권을 취득한다. 그래도 가장행위의 당사자 사이의 첫 번째 매매는 여전히 무효이므로 가장 매도인은 멋대로 부동산을 처분한 가장 매수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사람 사는 게 왜 이리 복잡할까? 혹시 사람의 진의를 남김없이 파악할 수 있는 AI가 생기면 이런 복잡한 법 규정들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이 무더위에 혼자 실없는 푸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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