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현수막은 못 건드린다? 줄자 들고 나선 공무원들, 이 법으로 잡았다
정당 현수막은 못 건드린다? 줄자 들고 나선 공무원들, 이 법으로 잡았다
광주 광산구, 내용 아닌 '설치 규정' 위반 집중 단속
8개월간 120건, 3840만원 부과
박병규 구청장 "시민 눈치 봐야지, 정당 눈치 보나"

광주 광산구가 혐오 문구 현수막 단속에 칼을 빼들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한 창원시내 현수막 모습. /연합뉴스
자극적인 문구로 거리를 뒤덮던 정당 현수막, 그동안 법적 규제가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됐다. 하지만 광주 광산구가 '내일로미래당'에 옥외광고물법 위반으로 과태료 750만원을 부과하며 이 통념을 깼다. 혐오 표현이 아닌, 법의 틈새를 파고든 역발상 단속이었다.
내용 아닌 규정 파고든 역발상
그동안 혐오·차별적 내용을 담은 정당 현수막은 사실상 법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옥외광고물법 제5조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 인권 침해 우려가 있는 광고물을 금지하지만, 정당 현수막은 '정당 활동'으로 분류돼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역시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문구의 적절성은 따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광산구청이 주목한 것은 내용이 아닌 설치 규정이었다. 정당 현수막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적 기준이 있다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31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유승민 작가에 따르면, 광산구청은 다음과 같은 세밀한 기준으로 단속을 벌였다.
- 게시 기간: 법정 기한인 15일을 넘긴 현수막
- 설치 높이: 횡단보도·버스정류장 10m 이내에 설치 시, 지면에서 현수막 하단까지 2.5m 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규정 위반
- 글자 크기: 최소 5cm를 넘어야 한다는 규정 위반
유 작가는 "올해 초부터 구청 직원들이 현장에 줄자를 들고나가 일일이 재면서 단속을 해왔다"고 전했다. 그 결과 광산구는 올해 1월부터 8월 말까지 법을 위반한 정당 현수막 120건에 대해 총 3,84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이는 다른 지자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광주광역시 내 다른 4개 자치구는 같은 기간 1400장이 넘는 불법 정당 현수막을 적발하고도 과태료를 한 건도 부과하지 않았다.
"시민 눈치 봐야지, 정당 눈치 보나"
이러한 적극 행정의 배경에는 지역적 특성과 구청장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광산구는 광주 내에서도 이주민이 가장 많고, 청소년 비율은 전국 최고 수준이다. 차별과 혐오 표현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인 셈이다.
박병규 광산구청장은 M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시민은 단속하고 정당 현수막은 단속하지 않는 것은 행정의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며 원칙을 강조했다. 그는 "공동체에 해가 되는 근거 없는 낭설이나 혐오적 표현을 아무렇게나 내거는 행위에는 엄격한 레드카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당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저희 같은 행정하는 사람들이 시민 눈치를 봐야지, 정당 눈치 보면 되겠어요?"라고 일침을 가했다.
'의지만 있다면 단속 가능' 보여준 선례
이번 광산구의 사례는 불법 현수막 관리 주체인 기초단체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법적 조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실제로 지난 4월, 서울 종로구는 '중국인 유학생은 잠재적 간첩'이라는 인종차별적 현수막을 게시 기간이 끝나기 전에 철거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한 바 있다.
'내일로미래당'의 경우, 후원자가 신청하면 아르바이트생이나 자원봉사자가 현수막을 거는 방식으로 운영돼 규정을 숙지하지 못하는 허점이 많았다. 광산구는 바로 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선례를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