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Law, Talk!] 법 앞의 카프카적 감성과 그 가능성, 영화 <알라딘>
[영화Law, Talk!] 법 앞의 카프카적 감성과 그 가능성, 영화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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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알라딘> 포스터 / 출처 : 네이버 영화
디즈니의 최근 행보는, 그래도 반성이 깃든 것처럼 보인다. ‘디즈니’라고 썼는데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읽히던 때도 있었다. <라이언 킹>, <타잔>, <라푼젤>, <인어공주> 등이 지금도 눈 시퍼렇게 뜬 채 살아있는 증거다. 해당 작품들에서 제3세계는 백인의 시각에서 ‘보여지는’ 대상이 되며 여성은 사랑을 위해, 즉 남성을 위하여 자신의 삶과 주체성을 기꺼이 상실한다.
비판이 쏟아지자, 디즈니는 성찰 끝에 과거를 재조명하기로 결심했다. 기성 애니메이션 실사화 작업인 ‘디즈니 라이브 액션 프로젝트’에 디즈니는 박차를 가하고 있다. 증거들을 부활시켜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는 셈이다. 위험도 크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어설프게 손을 대선 안 된다는 불문율 때문이다.
법 앞에서 질문하고, 선택하고, 자유를 갈망한 자스민
영화 <알라딘>도 이런 흐름과 같은 궤적을 그린다. 원작과 달리, 주체성을 흭득한 자스민(나오미 스콧 분)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다. 원작에서 자스민의 저항이 섹스어필을 토대로 한 미인계였다면 <알라딘>에서는 ‘나’를 주어로 한 일인칭의 노래이자 다짐이었다. 권력자 자파(마르완 켄자리 분)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입을 다문 채 키스해야 했던 자스민이 입을 열자 그 안에는 자유와 저항이 담겼다.
자스민의 변화는 고정된 제도권에 질문을 던진다. ‘여자는 술탄이 될 수 없다’는 법 앞에서 자스민은 침묵하지 않는다. 자스민이 부른 노래인 ‘Speechless’는 차별의 역사를 자료가 아니라 당사자의 진술과 표정으로 전달한다. 노래에는 “돌에 새겨진 모든 규칙, 모든 말이 몇 세기 동안 바뀌지 않았다”는 고발이 나오며 “이제 이야기는 끝났어”라는 의지가 등장한다. 자스민은 끝내 아그라바 최초의 여성 술탄이 된다.

<알라딘>의 카프카적 감성과 ‘법 앞에서’
앞서의 얘기로 볼 때 자스민은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과 닮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놓여진 처지에 좌절하지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버텨낸다. 현실의 잔혹함에 어떤 식으로든 진지하게 맞서게 되는데 이때 관객은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의 실현 가능성보다는 가치의 추구에 무게를 두게 된다. 최초의 여성 술탄이 된 자스민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해서 어색하지 않은 이유와 맥락을 같이 한다.
법 앞에서 자스민과 알라딘(메나 마수드 분)이 보여준 극복의 차이는 자명하다. ‘신데렐라 남주인공’이 된 알라딘은 맞서기보다는 우회로를 택했고, 요술램프와 지니라는 낭만적 거짓을 만나, 유머와 위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자스민이 공주로서 지도를 읽고, 외교에 관여하며, 지위의 자격을 ‘축적’할 때 알라딘은 요술을 부려 일순간에 왕자의 지위를 ‘흭득’했고, 화려한 행진을 통해 자신을 입증했다. 허황하다고 비판받는 자스민보다도 알라딘에게서 현실의 부채감을 읽은 까닭이다.
카프카의 짧은 소설 ‘법 앞에서’는 법 앞에서 사고를 멈추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 속의 농부는, 문지기 앞에서 평생을 떨다가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종국엔 죽음을 맞이한다. 죽어가는 농부에게 문지기가 남긴 말은 질문하고 두드려야 열리는, 법의 속성을 대변한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야겠소”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법과 정의를 명확히 구분한 바 있다. 몽테뉴와 파스칼로부터 인용한 구절은 법이 완성된 게 아니라는, 유일한 진리를 구축한다. 법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된다는 게 인용구의 골자다. 법 자체가 신성한 게 아니라 이해관계 속에서 짜인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시스템은 영원하지 않다.

침묵하진 않았으나, 고요를 넘어 외침이 되기 위해선
침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자스민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영화에서 자스민은 두 번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마저도 한 번은 자스민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앞에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하다면 인간은 고통에 침착해질 수 없다. 같은 상황에서 당사자 외의 인물이 침착함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폭력은 억압하는 자의 권리가 아니다. 폭력은 언제나 억압받는 자에게만 부여되어야 한다.
응당 커져야 할 자스민의 목소리는 외침에 도달하지 못했다.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했고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왔으나, 알라딘의 기지와 비교했을 때 분량상으로나, 플롯 상으로나 그 파장은 얕다.
온당한 분노의 표현은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 때론 법의 망을 넘어갈지라도, 불법이 초래할 사회적 혼란보다 불법이 수행하는 간접적 저항의 기능이 클 때 분노의 가치는 커진다.
혹자는 불법을 미화하지 말라며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법은 언제나 정의의 기능을 담아내지 못하며 법과 정의의 구분은 불법을 조장하지 않는다. 구분을 명쾌하게 해낼 수 있는 기계적 공식도 없다. 오히려 이를 잠재우려는 목소리가 권력을 고착화하고 법을 죽이며 정의를 퇴행하게 만든다.
정의는 법에 관계하면서도 그 바깥 또는 너머에 있다. <알라딘>의 자스민이 법의 테두리에서 머물렀다면 권력자 자파만 승승장구했을 게 자명한 이치다. 따라서 법에 대한 경의는 언제나 정의에 대한 사유와 동반하여야 하며 이때 방법론은 적어도, 침묵과 고요를 넘어서야 한다.

그럼에도 기자는 <알라딘>에서 가능성을 목격하였다. 현실의 처절함에 맞선 자스민의 카프카적 감성이 여전히 우리 사회속에서 유효하다는 점에서 그가 성취한 법의 균열이 반가웠다.
영화의 무대가 된 ‘아그라바’를 현실로 데려오는 과업은 이제 관객에게 넘겨졌다. 역사상 여성 술탄은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4년만에 암살당했고, 다른 한 명은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촉매 역할로 끝이 났다. 1992년의 자스민은 법 앞에서 권력자에게 입을 맞췄고, 2019년의 자스민은 법을 초과한 사유로 법 안으로 들어갔다. 자스민이 카프카의 순진한 농부나 알라딘과 다른 점은 여기에 있으며, 기자가 기대하는 현실의 자스민도 같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